'1977'에 해당되는 글 10

  1. 2007/05/12 Punk77 THE SEX PISTOLS
  2. 2007/05/12 Punk77 CARPETTES
  3. 2007/05/10 Punk77 999
  4. 2007/05/10 Punk77 X RAY SPEX
  5. 2007/05/10 Punk77 EATER
  6. 2007/05/10 Punk77 KILLJOYS
  7. 2007/05/08 Punk77 SIOUXIE & THE BANSHEES
  8. 2007/05/04 Punk77 RADIO STARS
  9. 2007/04/30 Punk77 THE DRONES
  10. 2007/04/28 Punk77 THE CLASH
1975년 여름, Malcolm McLauren의 진두지휘아래 출발했다.
그룹은 잠시동안 밴드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Wally Nightingale을 리드 보컬리스트로 맞아 Swankers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다 Sex Pistols로 개명하면서 Johnny Rotten(vocals), Steve Jones(guitar), Paul Cook(drums), Glen Matlock(bass)의 안정된 라인업을 유지했다.
 
1976년, 런던을 중심으로 부정기적인 연주활동을 갖는데 Malcolm McLaren이 상업적으로 잘 포장한 헤어스타일, 찢어진 티셔츠, 안전핀 등의 펑크패션은 금새 10대 팬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는다. 밴드의 공연은 항상 폭동이 끊이질 않았는데 100 Club Punk Rock Festival에서 Damned의 공연중 시드 비셔스가 날린 맥주병이 깨지며 한 소녀가 눈이 머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정점에 달한다.(실제로 그런 사고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그 사실이 불분명하다. 또 하나의 시드 신화라는 얘기도 있다.)

밴드는 곧 EMI와 계약하고 "Anarchy In The UK"를 발표하며 공식적으로 데뷔한다. 한편 Sex Pistols는 런던의 주말 TV연예 프로그램인《Today》에 출연해 네개의 철자로 된 말들을 마구 내뱉는데 이 사건은 다음날 런던의 신문 헤드라인으로 일제히 기사화 된다.(섹스 피스톨즈 TV에서 'FUCK'이라고 하다!)
이로 인해 그룹의 'Anarchy' 투어는 가느 곳마다 취소되기 일쑤였고, 레코드 판매상들은 그들의 앨범 판매를 거부했다. "Anarchy In The UK"는 차트 38위를 기록했으나 오래지 않아 EMI와의 계약을 해지당한다. 1977년, Matlock이 Sid Vicious로 교체되면서 다음달 버킹검 궁전 앞에서 A&M과 계약을 맺게 되는데 1주일 후 A&M은 계약을 취소하고 Malcolm은 단 1주일만에 계약금 40,000파운드를 챙긴다.
이후 당시에는 소규모 레이블이었던 Virgin과 계약을 맺고 "God Save The Queen"을 여왕의 즉위 25년 기념일인 Queen's Jubilee에 발표한다. 라디오 주간 방송들은 일제히 이 곡을 방송금지 시켰지만 NME차트 1위를 기록하고 Johnny Rotten과 그룹 멤버들은 길거리에서 극우주의자들에 의해 폭행을 당하기도 한다. 세번째 싱글 'Pretty Vacant'(Glen Matlock의 작품인)는 금새 Top10에 진입한다. 그리고 그해 겨울 "Holiday In The Sun"이 히트를 기록하면서 모두가 기다리던 데뷔앨범《Nevermind The Bollocks Here's The Sex Pistols》가 발매된다.

이후 실패 투성이의 미국 투어와 함께 다큐멘터리 필름의 제작에 들어가는데 멤버들의 관계에도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한다. 1978년 Rotten은 샌프란시스코에서의 공연을 마지막으로 그룹을 떠나겠다고 발표한다. 당시 매니저인 Malcolm은 그는 해고 당한 것이라고 이야기 하기도 했다. 한편 Malcolm은 브라질로 이동해 전직 열차 강도였던 Ronnie Biggs와 필름 제작을 계속한다. Sid는 헤로인 중독 문제로 이 작업에 참여하지 못하고 Jones와 Cook만이 작업에 참여했다. Malcolm은 Ronnie Biggs를 밴드의 보컬리스트로 싱글 "God Save The Pistols"를 녹음하는데 후에 'No One Is Innocent(A Punk Prayer)'로 제목이 바뀐다. b-side에는 Frank Sinatra의 고전을 커버한 Sid Vicious의 "My Way"를 수록한다.

Malcolm의 필름은 감독 Jullien Temple에 의해《The Great Rock'n' Roll Swindle》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된다. 필름이 완성되면서 Sid는 그룹의 중심인물이 되어 있었고 그가 다시 뉴욕으로 돌아오기 전 Eddie Cochran의 커버인 "C'mon Everybody"를 녹음한다. 1978년 10월 12일에는 Sid의 여자친구 Nancy Spungen이 첼시 호텔에서 칼에 찔린채 죽어 있었고, Sid는 살인 혐의로 체포된다. Sid는 보석으로 풀려나 있던 동안 헤로인과다 복용으로 고생하다 1979년 2월 2일 아침 시체로 발견된다.

Virgin Records는 이후《Flooging Dead Horse》(헛수고하기)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의 타이틀로 앨범을 발매하고 1986년 Johnny Rotten은 전 멤버들과 매니저였던 Malcolm과의 법정 소송에서 승리해 잃어버린 이름과 명예를 되찾으며 Sex Pistols와 완전히 결별했다.

차대선 (2004-07-21 02:07:50)
섹스피스톨즈..너무좋다.

조이라이더 (2004-12-05 23:13:49)
aituk

이지혜 (2005-01-01 00:09:38)
시드가 베이스를 잘치는 줄 알았다.//////

박인화 (2005-05-07 08:49:43)
섹스 피스톨즈의 진가는 그들의 연주 실력이 아니라 엿 같은 시대 상황에 온몸으로 저항한 그 정신이다. 그들의 저항 정신은 수많은 후배 락밴드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았던가...그리고 아직도 그 정신은 유효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김정운 (2006-05-31 17:11:36)
시드잘치진않지만 센스잇다 ㅋㅌ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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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PETTES

Band Information/#·A·B·C·D·E·F | 2007/05/12 04:27 | Punk77
Carpettes는 1977년 4월, 잉글랜드 북동부 지방에서 기타리스트이자 보컬리스트인 Neil Thompson, 베이스 연주자 George Maddison, 드러머 Kevin Heard 등으로 결성되었는데 모두 같은 학교 동창들로 스쿨밴드인 Brown Sugar에서 연주활동을 하고 있었다.

두번의 지역공연을 마친 후 Sounds에 게재된 대표적인 인디레이블이었던 Small Wonder의 광고를 보고 5곡이 담긴 데모테잎를 보내기도 한다. 같은해 12월, 밴드는 4곡이 담긴《How About You And Me》의 EP를 발매하게 되는데 이 EP는 언론과 언더그라운드 펑크팬진 모두에게 좋은 반응을 얻어내게 된다.
특히 타이틀곡인 "Radio Wunderbar"를 BBC의 Radio 1의 프로그램인 John Peel show에 출연해 정기적으로 연주하기도 한다. 이후 밴드는 2장의 앨범과 6곡의 싱글 발표했으며 많은 미발표곡들이 후에 재발매 되기도 했고, 영국과 이탈리아의 TV에 출연, 영국과 이탈리아, 독일, 네덜란드 등지의 순회공연으로 여전히 팬들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며 최근까지도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최근에는 Holidays in the sun 페스티발에의 출연과 UK Subs와의 잠시동안의 투어에 출연했다고 알려져 있다.

글출처: Carpettes 공식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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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

Band Information/#·A·B·C·D·E·F | 2007/05/10 15:50 | Punk77
런던출신의 펑크밴드 999는 1977년 5월에 처음 결성됐다.

밴드의 초창기 이름은 The Dials, 48 Hours, Fanatics 등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워졌는데, 그룹의 중심인물이었던 Nick Cash는 펍록밴드 Killburn And The High Rods의 기타리스트이자 Ian Dury와 같은 Camterbury 아트스쿨 출신이기도 했다. 

Guy Davis(guitar), Jon Watson(bass), Pablo LaBrittain(drum)등 다른 그룹멤버들과 함께 밴드는 런던의 중심부로 진출하는데 자신들의 레이블인 LaBrittain Records에서 첫번째 싱글 "I'm Alive"를 발표한다. 곧바로 United Artasts와의 계약에 성공한 이들은 이 싱글을 재발매하고 "Nasty Nasty"와 "Emergency" 의 두장의 싱글을 더 발표한다. 1977년 런던펑크의 고전들로 기록되는 이 곡들은 나머지 곡들이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1978년 데뷔앨범《999》에 같이 수록된다.

두 번째 앨범《Separates》에서는 또 다른 빅히트곡인 "Homicide"가 같이 수록된다. 그러나, 두번째 앨범 발표 후 드러머인 Pablo LaBrittain이 오토바이 사고를 당해 그룹은 스칸디나비아 투어도중 돌아오게 되고 드러머는 Ed Case로 교체된다. 미국에서도 앨범의 판매고가 급증하자 밴드는 북미투어를 감행하고 이는 대성공으로 이어지며 많은 골수팬들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Pablo LaBrittain이 드러머로 다시 복귀하면서 밴드는 Radarscope Records와 계약을 맺는다.

《The Biggest Prize In Spot》과《Concrete》앨범은 밴드의 가장 훌륭한 앨범으로 평가받고 있고 이러한 인기는 1983년에 발표된 앨범《13th Floor Madness》까지 이어지는데, 1985년에는 마지막 스튜디오 앨범인《Face To Face》가 발표되며 Watson이 그룹을 떠나자 Danny Palmer 를 고용해 유럽과 미국투어를 무사히 마치게 된다. 90년 이후 밴드는 몇개의 컴필 앨범 참가와 라이브 앨범들을 발표하며 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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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 RAY SPEX

Band Information/T·U·V·W·X·Y·Z | 2007/05/10 14:44 | Punk77
1977년의 펑크원년을 대표하는 밴드 중 하나이다.

보컬리스트인 Poly Styrene은 독특한 패션감각과 치열교정기를 트레이드 마크로 곧 런던펑크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여기에 핀란드 펑크의 대모로 불리우며 후에 Glyn Johns로 바뀌는 색소폰연주자 Lora Logic, Jak Stafford(guitar), Paul Dean(bass)(후에 Loverboy의 멤버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름만 같은 다른 인물인 듯 하다.), B.P.Hurding(drums)의 멤버들로 처음 결성된 밴드는  1977년 라이브 활동을 시작한 후《Live At The Roxy WC2》라는 비공식 앨범을 발표하기도 한다.

독특한 분위기의 곡들인 "Germfree Adolescent", "Oh Bondage Up Yours", "The Day The World Turned Dayglo", "Identity"등의 싱글들은 펑크의 에너지로 충만할뿐 아니라, 직설적이지만 진지한 언어로 70년대 후반 도시 젊은이들의 천편일률적인 패션감각을 비난하며, 자신들만의 독특한 표현양식을 가질것을 권유했다. 항상 팝스타에 대한 혐오감을 유지하고 있던 Poly는 1979년에 그룹을 해산하고 Krishna Consciousness Movement에 참여한다.

해산 후에 발표된 마지막 싱글인 "Highly Inflammable/Warrior In Woolworths"에서도 Poly의 초기모습을 여전했다. Poly는 솔로로 독립해 1980년《Translucence》와 85년 Ep《Gods And Goddess》를 발표하지만 더이상 상업적인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김동인 (2003-11-20 23:22:53)
노래가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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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TER

Band Information/#·A·B·C·D·E·F | 2007/05/10 14:39 | Punk77
1976년, 영국에서 결성된 Eater는 아직 10대 학생이었던 Andy Blade (vocals), Dee Generate(drums), Brian Chevette (guitar), Ian Woodcock (bass)의 멤버들로 결성되었다.

1977년 봄, Alice Cooper의 'Eighteen'을 무자비하게 리메이크한 '15'를 첫싱글로 발표한 밴드는 Woolworths라는 레이블의 지원을 통해 악기들을 구입한 후 곧바로 레이블에 픽업돼 'Outside View'나 'Lock It Up' T-Rex의 곡을 리메이크한 'Jeepster'까지 총 다섯장의 싱글을 발표한다.

같은해 이들의 데뷔앨범이 발표되나 라이브나 초기싱글들이 가지고 있던 강력한 에너지를 보여주는데는 실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ater는 초기펑크의 정신중의 하나인 get up and go의 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선구자적인 밴드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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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LLJOYS

Band Information/G·H·I·J·K·L·M | 2007/05/10 13:23 | Punk77
The Killjoys는 Dexys Midnight Runners' 의 보컬리스트이자 중심인물이었던 Kevin Rowland가 70년대 중반 이끌었던 펑크밴드이다.

버밍햄 출신의 밴드인 Lucy And The Lovers를 이끌던 케빈은 Gill Weston (bass), Mark Phillips (guitar), Heather Tonge (vocals) , Joe 45/Trevor (drums) 등의 멤버들과 함께 펑크열풍에 빠져들게 되고 77년 7월, Raw Records에서 첫싱글 'Johnny Won't Go To Heaven'을 발표한다.
이후 이들의 정규앨범은 단 한장도 발표되지 않았고, 그해 11월 Rowland 는 전 Killjoys의 멤버이자 후에 The Bureau에 가담하게 되는 Al Archer와 함께 Dexys Midnight Runners를 결성한다.

'Johnny Won't Go To Heaven' 은 여러가지 형태의 데모버전으로 Raw Records에서 발매되는 컴필레이션 앨범에 수록되곤 했는데 90년대 초에 Damaged Goods Records에서 발매된 'Naive'에서는 인터뷰와 여러가지 데모버전이 함께 수록됐다.

이 앨범에서는 특유의 버밍햄 악센트로 인터뷰하는 Rowland와 조악한 음질의 초기 밴드의 곡을 들을 수 있다. Gill Weston은 이후 Girlschool의 베이스 연주자로 성공적인 활동을 이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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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ouxsie Sioux와 Steven Severin은 초창기 섹스 피스톨즈 를 따라다니던 악명높은 그루피들인 Bromley Contingent의 일원이었다.
Siouxsie는 100club Punk Festival에 참여해 "The Lord's Prayer"를 길게 편곡해 부르는데 당시 드러머는 시드 비셔스였다.

Siouxsie는 섹스 피스톨즈가 출연해서 'fuck'을 포함한 온갖 방송 금지용어를 내뱉어 유명해진 연예정보 프로그램<Today>에 출연해 사회자인 Bill Grundy와 대화를 주고 받으며 유명세를 타게 된다. 그 사건이 있은 한달후 Siouxsie는 자신의 밴드인 Banshees의 멤버를 모으는데 Pete Fendon(guitar), Steve Severin(bass), Kenny Morris(drums)가 여기에 참여한다.
Siouxsie는 나찌의 비주얼과 고딕풍의 블랙 메이크업, 그리고 가슴을 드러내는 행동으로 주목을 받는다. 1977년 중반에는 Fendon이 John McGeogh로 교체되고 그룹은 Johnny Thunders and Heartbreakers의 지원을 받으며 BBC의 디스크 자키인 John Peel Session을 위해 레코딩을 하기도 한다.
1978년, 그룹은 Polydor과 계약하고, 첫번째 싱글인 "Hong Kong Garden"을 발표해 UK Top10을 기록한다. 곧이어 Steve Lillywhite가 프로듀스한《The Scream》이 발표돼 "The Staircase(Mystery)"와 "Playground Twist"가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며 다음 앨범인《Join Hands》까지 성공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프로모션 투어 도중 Morris와 McKay가 그룹을 떠나고 전 Slits의 멤버인 Budgie와 Cure에서 온 Robert Smith가 임시멤버로 가입한다. Siouxsie의 나찌이미지의 영향은 "Mittageisen(Metal Postcard)"에서도 다시 한번 나타나며 Top 50을 기록하고 "Happy Hpuse"와 "Christine"도 멜로딕한 사운드로 큰 성공을 거둔다.

《Kaleidoscope>의 성공이후 그룹은 구 소련내에서의 공연을 포함한 대규모 월드 투어를 기획한다. 또다른 Top 10앨범인《Juju》이후 멤버들의 다른 활동들이 시작되는데 Siouxsie와 Budgie는 The Creatures를 결성해 앨범 발매와 함께 Top10을 기록하는 성공을 거두며, Smith와 Severin은 Glove라는 그룹으로 성공을 거둔다.《A Kiss In The Dreamhouse》의 앨범 녹음을 위해 다시 모인 그룹은 1983년 가을, 이탈리아 공산당을 위한 공연을 가지기도 한다. 이후 비틀즈의 곡을 편곡한 "Dear Prudence"는 UK 차트 3위까지 기록하는 대성공을 거둔다.
1984년에는 "Swimming Horse"가 다시 한번 히트를 하고, 약간의 멤버 교체가 있었는데 Clock DVA에서 활동하던 John Carruthers가 잠시 가입하나 곧 John Klein으로 교체된다.

80년대 중반에 발표된 앨범들은 고정적인 팬들의 확보로 상업적인 성공에 대한 부담감에서 벗어나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스튜디오 작업에 임했음을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Through The Looking Glass》는 앨범 전체를 커버곡으로 채운 흥미로운 앨범이기도 하였는데 Bob Dylan의 커버곡인 "This Wheel's On Fire"는 UK Top20을 기록한다. 음악적인 변신을 한《Peepshow》역시 타협을 모르는 직선적인 태도를 보여주었고, 1991년에는 댄스곡 "Kiss Them For Me"와 《Superstition》으로 다시 한번 차트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여전히 실험적인 음악을 연주하며 이따금씩 차트에 등장하기도 한다.
(Siouxsie &The Banshees는 98년 2월, "모든 사람들이 안전핀을 꽂고 머리를 염색한 가수들과 계약하려 한다. 그들은 상업적으로 이용해 먹기 위해 펑크록의 영광을 부활시키려 하고 있다."라며 그룹의 해산을 선언했다. 인터뷰가 있던 날은 시드 비셔스가 사망한 날이었다.)  

조이라이더 (2004-01-13 21:22:49)
최고최고

도일만 (2004-08-06 05:50:52)
펑크록이라고 보긴엔 좀 뭐하죠..

조이라이더 (2004-12-05 23:14:52)
오~베이비오~ 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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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08 13:40 2007/05/08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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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DIO STARS

Band Information/N·O·P·Q·R·S | 2007/05/04 20:58 | Punk77
1977년 Andy Ellison(vocals), Ian McLeod(guitar), Martin Gordon(bass) 등 전 Jet의 멤버들 세명과 이전 Ellison과 Gordon의 밴드였던 John's Children, Sparks 시절부터 친분이 있던 드러머 Steve Perry가 합류해 출발했다.

초기의 싱글 "Dirty Pictures", "Nervous Wreck" 같은 곡이 히트를 기록하며 특유의 경쾌한 팝/펑크를 들려주었는데 대중적인 관심을 얻지는 못했다. 후에 전 Sparks의 멤버인 Trevor White 가 들어오나 곧바로 1978년 12월 Gordon이 그룹을 떠나며 밴드는 해산해 버린다.

Ellison과 White는 계속해서 프로젝트 형식으로 음악활동을 이어가는데 이들 역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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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04 20:58 2007/05/04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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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RONES

Band Information/#·A·B·C·D·E·F | 2007/04/30 13:04 | Punk77
Drones는 Buzzcocks, Slaughter & The Dogs, Warsaw(후에 Joy Division으로 바뀜)등과 함께 맨체스터 출신으로 초기 영국의 펑크운동에 많은 영향력을 끼친 밴드이다.

1976년말 M.J. Drone (vocals), Gus Callender (guitar), Steve Cundell (bass), Pete Howells (drums)등 4명으로 출발한 Drones는 여러 메이저 레이블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자신들의 레이블인 Ohms Records를 통해서 여러장의 싱글들을 발매하며 1977년 봄, 첫Ep인《Temptations of a White Collar Worker》를 발매했다.

이후 자신들의 새로운 레이블인 Valer에서 새로운 싱글 "Bone Idol"을 발표한 후 다음해 유일한 정규앨범인《Further Temptations》을 발표한다. 한편 Beggars Banquet의 샘플러 앨범《Street》에 이들의 곡이 실리고 78년 중반에는 펑크 다큐멘터리 필름인《Short Circuit - Live At The Electric Circus》에 출연하기도 한다.

1978년 11월 3일 오후 5시에는, 맨체스터의 옥스포드 거리에서 허가 없이, 그것도 3000와트의 엄청난 앰프를 동원해 공연을 하는 바람에 경찰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1980년, Fabulous 레이블을 통해 밴드의 마지막 싱글인 "Can't See"를 발표하나 1981년 그룹은 해산한다. 1997년에는 오리지널 멤버 3명에 새로운 베이스 연주자인 Pete 가 합류해 공연활동을 갖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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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30 13:04 2007/04/30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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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LASH

Band Information/#·A·B·C·D·E·F | 2007/04/28 16:13 | Punk77
클래쉬는 70년대 영국 노동자 계층 젊은이들이 느끼는 분노와 좌절을 전달했으며 도전 정신과 전세계가 안고 있는 압제, 폭력 같은 문제를 상징화 하면서 미래에의 희망을 꾀했다. 영국내에서만 반향을 얻는데 그쳤던 몇몇 영국 펑크 밴드들과는 달리 클래쉬는 여러 사회 젊은이들의 공감을 두루 얻어냈다. 노랫말은 노동자 계층을 반영하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이들은 노동자 계층에서 그 근원이 찾아지는 영국의 초기 파시즘이나 극우정당인 국민전선의 인종차별주의에 대해서는 맹렬히 반대했다.)

멤버들의 출신계층은 대부분 중산층이었으나 이들의 어린시절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클래쉬의 멤버들중 둘은 결손가정 출신이다. 기타리스트 믹 존스는 할머니와 심술궂은 고모들 틈바구니에서 눈치밥을 먹으며 어린시절을 보내야 했다. 아버지가 교장선생님이고 어머니는 교사였던 니키 히든의 가정 역시 화목하지 못했다. 한때 그는 절도행각을 하고 깡패들과 어울리던 시절이 있었다. 만일 밴드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전과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얘기한 적도 있다.
레코드 회사에서 작성한 보도자료를 통해본 클래쉬의 초기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1967년 5월 런던의 세퍼드 부쉬 근교에 있는 한 조그만 불법 건조물에서 드러머도 구하지 못한 채로 리허설을 가졌다. 베이시스트인 폴 시모논은 베이스 경력 단 6주였다. 그는 브릭스턴의 황야 출신으로 부모님이 갈라선 뒤 아버지와 함께 살았으며 장학금을 받아 예술학교에 들어갔는데 친구 하나가 그룹의 가입을 권유해 왔다. 기타리스트 믹 존스가 바로 그 친구다. 폴과 같이 브릭스턴 출신인 믹은 아버지가 택시운전을 해서 먹고 살았다. 믹이 여덟 살 때 부모님이 이혼했다.어머니는 미국으로 떠나고 아버지는 가출하여 할머니 댁에서 눈치밥을 먹으며 자랐다. 클래쉬가 만들어 진 뒤 그는 해머스미스 예술학교를 자주 드나들던 참이었다. 폴과 믹은 밴드의 싱어감으로 조 스트러머를 찍었다. 당시 조는 심심풀이 삼아 반은 용돈이라도 벌어볼 요량으로 런던의 술집 밴드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스트러머는 클래쉬에 들어가기 전에 101ers라는 밴드에서 활동했는데 이 밴드는 50년대 스타일의 로큰롤 음악을 하는 밴드로 "Letsagetabitarrockin'"이라는 곡을 발표한 바 있었다. 스트러머는 "White Riot" "London's Burning" "Guns On The Roof"같은 같은 뜨지 못한 노래들의 작곡에 참여하기도 햇었다. 스트러머가 초기에 영향받은 아티스트는 미국의 아방가르드 록커 캡틴 비프하트(Captain Beefheart)다.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캡틴 비프하트의《Trout Mask Replica》앨범은 자신이 열여섯 살 시절 일년 내내 끼고 듣던 유일한 음반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다음은 결성되고 처음 몇달간 벌어진 상황이다.

"원래 키스 리바인 이라는 기타리스트가 있었는데 결성되고 얼마 안되어 급한 볼일이 잇다며 그룹을 나와 런던 북부로 떠나 버렸다. 1976년 8월 그룹은 캠든 타운의 버려진 창고에서 재정비를 가졌다. 그뒤 테리 차임스가 드러머로 새로 들어왔고 밴드는 창고에서 맹연습을 가졌다. 그러나 연주를 펼칠 무대가 없었다. 로큰롤의 고향으로 일컬어지는 유명한 마키 클럽은 클래쉬에게 '펑크록 사절'이라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그러다가 버니 로즈를 매니저로 맞아서 마침내 연주무대를 갖게 됐다. 하루는 공연이 유난히도 난잡스레 전개되어 무대로 병과 깡통이 마구 날아왔다. 드러머 테리 차임스가 여기에 질린 나머지 그룹을 나가고 말았다."
 
테리 차임스가 나간뒤 후임 드러머를 뽑기 위한 오디션이 치루어졌다. 206명의 후보자들 중에서 Nicky "Topper" Hidden이 뽑혔다. 클래쉬는 처음에는 별다른 관심을 얻지 못했으나 얼마 안있어 커다란 반응을 얻기 시작했다. CBS 레코드사가 이들에게 상당한 금액의 계약금을 제시해 와 계약이 이루어졌다. 음향효과 담당자를 프로듀서로 하여 런던에 있는 CBS 3호 스튜디오에서 3주에 걸쳐 데뷔앨범《The Clash》를 만들었다.
12월에 예정됐던 펑크/뉴웨이브 영국투어의 오프닝이 취소되자 클래쉬는 자체적으로 'White Riot'이라는 공연을 기획하여 Buzzcocks, The Slits, Subway Sect와 함께 공연을 가졌다. 이 공연 덕에 클래쉬는 영국내 언론 매체의 관심을 얻어냈고 데뷔앨범 또한 차트 상위권에 올라갔다.《The Clash》는 영국 앨범차트 12위까지 올라갔고 77년에는 싱글들이 커팅됐는데 방송에서는 제대로 틀어지지 못했으나 차트 28위까지 올라갔다. CBS 레코드사는 미국시장을 겨냥하여 다음 앨범의 프로듀서로 Blue Oyster Cult와의 음반작업으로 유명한 샌디 펄먼을 붙여 주었다. 대부분의 녹음작업은 런던에서 이루어졌으나 마무리 손질은 미국에서 행해졌다. 앨범발매에 앞서 CBS는 "Clash City Rockers/Jail Guitar Doors"(1978년 3월 17일)와 "White Man In Hammersmith Palais/The Prisoners"(1978년 6월 16일) 2장의 싱글음반을 영국에서 먼저 발매했다. 이 싱글들은 큰 히트를 거두지 못했으나 두번째 앨범《Give'em Enough Rope》는 1978년 11월 발매된 뒤 영국차트 2위까지 올라갔다. 이 앨범은 Epic 레이블을 통해 미국에서도 발매됐으며 1979년 초에는 첫 미국공연이 이루어졌다.

미국공연을 갖기에 앞서 클래쉬는 영국공연을 가졌는데 이때 매니저 버니 로즈와 사이가 틀어져 결별했다가 뒤에 80년대에 다시 손을 잡게 된다. 79년 2월에 시작된 북미공연은 캐나다와 미국의 주요도시들을 돌았는데 그곳의 평론가들과 팬들이 성원을 보내와 클래쉬는 힘을 얻었다. 클래쉬를 최고의 록밴드라고 볼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마구 몰아치는 연주와 열정은 여느 펑크/뉴웨이브 밴드와는 비교할 수 없는 충격을 전해주며 이들의 음악을 듣는 청중들을 만족시켰다. 클래쉬의 음악들에는 힘이 담겨 있었으며 몇몇 곡에는 레게의 느낌도 배어 있었는데 가사는 따로 접어 두더라도 이들의 음악을 들으면 록 음악의 흥이 느껴졌다.
히든은 1979년 3월 5일자 타임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Sex Pistols와는 부류가 다릅니다. 무대 위에서 자해행위를 가해 사람들을 놀래키거나 하는 짓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나만해도 핀으로 코를 찔러대는 짓거리 같은 것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클래쉬의 첫 미국공연에 대해 타임지의 잭 콕스 기자는 이렇게 적었다.

'클래쉬는 우아한 연주자는 아니지만 섹스 피스톨즈가 했던 것보다는 훨씬 더 재주있게 음악을 만든다. 이들의 사운드는 누적되는 폭력행위를 폭발시키고 이들의 노래에는 위협과 도전이 기득차 있지만 위험하지는 않다. 이들은 규칙보다는 분노, 절망, 폭력 등에 대해 노래한다.'

영국 이외 지역 팬들에게 있어서 클래시의 활력있는 편곡과 다중의 의미를 지닌 노랫말은 다른 펑크 그룹들보다 클래쉬를 한층 와 닿게 해 주었다. 미국에서도 이들의 데뷔앨범은 그런대로 괜찮은 반응을 얻었으나 골드 레코드를 기록할 정도는 못됐는데 그 이유는 방송 전파를 제대로 타지 못한 탓이었다. 두번째 앨범을 프로듀스한 샌디 펄먼은 이런 얘기를 했다.

"라디오 방송국과 레코드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뉴웨이브'는 위험 신호였습니다. 그 이유는 나도 모르겠습니다. 테드 뉴젠트 이후 중서부 최고의 신진 하드록 밴드로 알려진 Tony And The Tuna Fish의 음반 같은 거나 방송을 탈만한 거죠."

스트러머는 1979년 2월 3일자 로스앤젤레스 타임즈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라디오 방송국 실무자들은 앞뒤가 꽉 막힌 사람들 이에요. 1954년 록 음악이 라디오 방송 전파를 탔을때 자녀들이 록 음악을 듣는 것에 대해 어머니들은 끔찍한 음악이라고 못마땅해 했죠. 그런데 그 자녀들이 자라 부모가 되서는 다시 자녀들에게 펑크 음반 같은 건 집에 들여놓지도 말라고 소릴 지르지요. 결국에는 그들 역시 그렇게 자멸해 가는 겁니다."

북미투어를 마친 클래쉬는 영국으로 돌아와 새 앨범 작업에 착수하여 1979년말 CBS에서《The Cost Of Living》앨범을 발표했다. 이 앨범은 영국차트 22위까지 올랐으며 79년 11월 24일에는 두번째 앨범의 수록곡 "Tommy Gun/ 1-2 Crush On You"가 싱글로 발표되었다. 66년에 바비 퓰러가 불러 히트시켰던 "I Fought The Law"를 커버한 곡이 미국에서 처음으로 싱글로 발표되었는데 이 곡은 과거와는 달리 제법 방송전파를 탔다. 그해가 다 가기 전 CBS에서는 "London Calling/ Armageddon Time"이 싱글로 발매됐다. 1979년 미국에서는 Epic레이블을 통해 데뷔앨범《The Clash》가 더블앨범으로 발매되며 클래쉬의 명성이 급상승했다. 미국발매반에는 기존의 수록곡 열 다섯곡 외에 "Gate Of The West/Groovy Times"가 보너스 싱글로 수록됐다. 니키 히든도 드럼연주릃 했지만 Tony Crimes(Terry Chimes의 필명)가 아홉곡의 드럼연주를 했다. 롤링 스톤지는 이앨범에 대해 '펑크음반의 결정타'라고 평했다. 앨범내 대부분 수록곡을 쓴 존스와 스트러머는 주제와 리듬패턴을 구사함에 있어서 록의 반경을 넓혀 놓았다는 평을 받았다.

1980년에는 Ep《Black Market Clash》와 뛰어난 신작앨범《London Calling》으로 미국차트에 등장했다. 또한 79년에 나온 앨범《The Clash》도 계속 히트 대열에 올라 있었다. 미국에서의 새로운 지지구축을 상징하듯 1980년 4월 17일자 롤링 스톤 지에는 이들의 기사가 커버스토리로 실렸으며 이후 대규모의 클래쉬의 콘서트가 치뤄졌다. 1981년에는 가 히트를 했다. 새 앨범이 나오기 전인 82년 여름 니키 히든이 갑자기 그룹을 탈퇴하여 오리지날 드러머 테리 차임스가 미국 공연 드럼 연주를 대신 해주었다. 이때의 미국공연은 새 앨범《Combat Rock》홍보의 일환이었는데 이 신작앨범은 플래티넘을 기록했다. 이 앨범의 수록곡 "Know Your Rights"와 "Should I Stay Or Should I Go"가 초여름 미국에 싱글로 발매됐다. 두곡 모두 차트에 올랐으며 이후 발매된 "Rock The Casbah"는 유머러스한 뮤직비디오도 함께 제작되었는데 영국과 미국에서 모두 Top 10까지 올라갔다. 1982년에는 헤드라이너로 미국공연을 치르는 한편 그해 9, 10월에는 밴드 The Who의 미국공연에에도 특별 게스트로 참여했다. 그러나 이렇게 수퍼그룹의 지위를 쌓아 나가는 와중에 그룹 내부에서 멤버들 사이에 불화가 발생해 1983년 믹 존스가 그룹을 나갔다. 1984년 1월에 가진 어느 인터뷰에서 스트러머는 믹 존스의 탈퇴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한때 믹은 내 최고의 친구였습니다. 우리는 파트너였죠.-그들은 클래쉬의 곡을 함께 만들어내는 작곡 콤비였다.-파트너 없이 일을 해 나간다는 것은 내게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헌데 그가 무관심해지기 시작했어요. 스튜디오 작업도 하기 싫어했고 투어도 꺼려했습니다. 그저 휴가 얻어 쉬는 거나 좋아했지요. 이제 그는 더 이상 우리와 함께 하지 않습니다."

믹 존스의 탈퇴는 작곡 작업에 있어서 치명적인 손실이었음이 곧 명백하게 드러났다. 클래쉬를 나온 믹은 Big Audio Dynamite를 결성하여 85년 Columbia 레코드사를 통해《This Is Big Audio Dynamite》를 발표하여 86년에 베스트 셀러 앨범을 기록했다. 반면 클래쉬는 1985년말《Cut The Crap》이라는 새 앨범을 발표했지만 인기를 얻지 못햇다. 인기가 예전만 하지 못했던 것이다. 뒷날 스트러머는 클래쉬가 해산에 이른것은 믹 존스 보다도 자신에게 탓이 있었노라고 털어 놓았다. 그는 영국의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믹 존스 탈퇴 당시의 경위를 이렇게 털어 놓았다.

"1983년 버니 로즈가 다시 클래쉬의 매니저로 복귀했을때 이미 불씨가 일었던 것입니다. 믹과 버니는 서로 영 안맞았어요. 버니는 믹이 나쁜 사람이라고 내게 계속 세뇌를 시켰지요. 버니의 말이 전혀 얼토당토 않은건 아니었어요. 믹도 인정할 겁니다. 사실 믹은 다루기가 힘든 사람이었어요. 게다가 나도 성질없는 사람은 아니고, 그러다 보니 결국 믹을 내보내야 겠다는 생각도 들게 됐던거고."

"믹한테는 몹쓸 짓을 한 거예요. 내가 믹을 중상모략했던 셈이니까. 그 사람이 마음을 넓게 써서 앞으로 다시 곡을 함께 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우린 서로 완전히 다른 영역을 관할하니까 서로의 스타일을 간섭하지 않을 수 있어요. 그렇게 하는게 바람직하긴 하지만 간섭 안한다는건 사실 힘들어요. 둘이서 간섭 안하면서 같이 일해 나가는게 좋긴 하지만 힘들다는걸 깨달았습니다."

1986년 초 클래쉬가 해체됐고 스트러머는 솔로활동에 착수했다.그는 "Love Kills"라는 곡을 만들어《Sid & Nancy》라는 영화에 삽입시켰다. 이 영화는 Sex Pistols의 베이시스트인 시드 비셔스가 1978년 여자친구 낸시 스펑겐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에 회부되기 직전 사망한 사건을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클래쉬의 해산을 마지막으로 앞으로 음악활동을 중단할 것이냐고 어느 기자가 질문을 던진 적이 있는데 스트러머는 이에 대해 펄쩍 뛰며 음악계를 떠날 생각은 없다고 부정했다.

"농담하는 겁니까? 이 조 스트러머가 런던에서 택시운전을 하면 어떻겠습니까? 지나가는 사람들이 '저 사람이 조 스트러머였어'하고 수군대겠죠. 나는 완전히 과거의 사람으로 파묻혀 지는거죠. 사람들이 '당신 조 스트러머 맞아요? 한땐 나도 당신 팬이었어. '하면서 지나친다면 참담한 심정이 들지 않겠어요?"(로스앤젤레스 타임즈 1986년 8월 9일자)

앞으로 어떻게 활동할 것인가를 놓고 머리를 짜던 스트러머는 87년에《Walker》(우리나라에는 <불사신 워커>라는 제목으로 비디오로 출시되어 있음. 에드 해리스 주연, 알렉스 콕스 감독)라는 영화의 사운드트랙에 음악을 삽입했고 Pogues의 미국공연에 리듬 기타리스트로 참여햇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은 단지 휴가를 갖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다시 록 음악계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실히 결정을 못 내렸어요. 사실 로큰롤에 대한 생각은 잠시도 멈춰본 적이 없어요. 지금은 잠시 휴가를 갖는 것일 뿐입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즈 1988년 1월 31일자)

스트러머는 Big Audio Dynamite가 86년 발표한《No 10 Upping Street》앨범을 프로듀스해 주기도 했으나 클래쉬의 재결성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91년 "Should I Stay Or Should I Go"가 싱글로 재발매되어 영국차트 1위를 차지하며 클래쉬의 이름을 다시 한번 등장시켰다.

출처 핫뮤직

이민우 (2003-07-12 11:28:14)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클래쉬와 섹피 이들 중 과연 누가 우위에 있단 말인가
하지만.....비틀즈와 롤링처럼 이들도 서로 같은 곳에서 같은때 공존할수밖에 없었던 운명인것이다
특히....그 중에서도 클래쉬의 필요성은 더욱더 큰것이다!!!!!


김현철 (2003-12-31 15:07:33)
섹피만 알다가 클래쉬들었는데, 죽이네요^^


강경화 (2005-06-07 01:15:55)
좀 제가 있어선 너무 노땅 같은 밴드이지만 런던칼링에서 브랜드 뉴 캐딜락 진짜 좋고..로스트 인 슈퍼 마켓도 좋아요.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2007/04/28 16:13 2007/04/28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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