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펑크'에 해당되는 글 16

  1. 2011/03/09 Punk77 V/A - Sharp Cuts : New Music From American Bands(1980, Planet)
  2. 2010/07/13 Punk77 THE PALEY BROTHERS - S/T(1978, Sire)
  3. 2010/06/08 Punk77 THE LAUGHING DOGS - S/T(1979, Columbia) (2)
  4. 2010/01/23 Punk77 NEW YORK DOLLS - New York Tapes 1972/1973(1999, Skydog/Munster)
  5. 2009/12/27 Punk77 V/A - Max's Kansas City Volume II 1977(1977, Ram)
  6. 2009/03/16 Punk77 NEW YORK DOLLS - Personality Crisis(1982) (2)
  7. 2007/05/10 Punk77 THE FAST
  8. 2007/05/09 Punk77 MARSHALLS
  9. 2007/05/08 Punk77 PATTI SMITH
  10. 2007/05/07 Punk77 DAVID JOHANSEN

5년 전, 록은 이전부터 자신들의 음악적 영역을 확고히 해 온 유명 아티스트들만의 영역이였다. 컨트리록, 블루스잼, '진보적인' technoflash, 발라드 싱어송라이터 등 등. 새로운 밴드에 관한 한, 그들은 당대의 히트곡을 연주하지 않으면 연주할 수 없었다 ; 유명 레이블과 계약하지 못하면 녹음할 수 없었다. 로큰롤은 썪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5년이 지나고 새로운 상황이 왔다. 잊혀진 로큰롤 형식을 세련되게 연주하거나 새로운 형식을 창작해내는 새로운 록 밴드들이 많은 숫자로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클럽들이 그들을 수용하기 위해 생겨났다 ; 그룹들은 그들만의 소규모 레이블에서 정기적으로 레코드를 발표했고 그들 중 일부는 라디오 공중파를 탔다. 그것은 60년대 중반 이후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로큰롤 열기의 부활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본질적으로 그것은 명백히 희망이 없는 상황에 대한 대중의 반작용 이었다. 영국에서 밴드들은 로큰롤과 블루스의 기본으로 돌아가 펍에서 연주했다. 사회적인 소요들을 불러 일으키고 펑크록 운동이 태어났다. 미국에서는 뉴욕, 보스톤, LA의 밴드들 그리고 온 나라에 걸쳐 밴드들이 함께 단결했다. 그들의 음악적인 접근방식은 크게 달랐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메인스트림 록의 자기만족 대상으로 인식되는 것에 반대해 뭉쳤다. 수많은 이질적인 것들이 변형되어 결합한 음악들은 다루기 힘든 것이었지만 새로운 신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가끔은 왜곡되어 보여졌고, 파벌이 자라났고, 경쟁심이 생겨났지만 자유분방한 에너지만은 막을 수 없었다.

이 레코드에는 지난 5년간 반란의 시기를 주도했던 매우 다양한 스타일의 미국 아티스트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다양함과 열정과 생생함, 서투름, 억누를 수 없었던 흥분의 순간들의 기록들을 담아내려 하고 있다. 그것은 현재의 정수로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고 있으며 로큰롤 정신의 인내력에 경의를 표하고 있다. 이 새로운 각성에서 배울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격려가 되는 교훈이 있다면 로큰롤이 수많은 역경과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음악적 영향들을 견디어 낼 것이고, 단지 로큰롤은 계속될 것이라는 것이다.

라이너 노트에서

- Ken Bar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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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NOW(Gary Valentine) - I Like Girls
 

THE FAST 'Kids Just Wanna Dance" 1977 Live @ Max's Kansas City
 

THE ALLEY CATS - Black Haired 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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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9 01:46 2011/03/09 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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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y Paley와 함께 Paley Brothers를 결성하기 전 Jonathan Paley는 70년대 초 뉴욕에서 Mong이라는 밴드를 결성해 뉴욕펑크의 씨앗을 뿌렸다. Televison, Heartbreakers 같은 밴드들을 중심으로 뉴욕펑크가 꽃을 피우기 시작할 무렵, 보스톤에서는 Paley 형제의 주도 하에 보스톤 펑크의 또 다른 개척자 Nervous Eaters의 멤버들, 1972년에 앨범을 발표한 바 있는 보스톤의 프로토 펑크밴드 The Sidewinder의 기타리스트 Eric Rose 등이 참여한 파워팝밴드 Paley Brothers가 탄생한다.
Jonathan은 Heartbreaker의 멤버가 될 뻔했지만 드러머 Jerry Nolan의 반대로 펑크 수퍼그룹의 탄생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Andy는 Jerry Harrison과 함께 Catfish Black이라는 밴드에 있었으며 Jerry Harrison은 Modern Lovers를 거쳐 Talking Heads를 결성했다.

틴에이저들을 겨냥한 팝앨범으로 기획된「The Paley Brothers」(1978)는 레코드사의 바램대로 상업적인 성공을 가져다 주지는 못했지만 언더그라운드 팝/록팬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어냈으며, 보스톤의 파워팝 밴드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70년대 초중반, 메이저에서 정체기를 보내는 듯 했던 팝밴드들은 펑크시기를 전후로 부활하기 시작하면서 포스트록 시대에 상업적으로도 어느 정도의 성공적인 시기를 보냈는데 이는 50~60년대 팝과 모던팝의 절묘한 연결고리 역할을 했던 The Paley Brother 같은 언더그라운드 팝밴드들의 생명력과 실험정신에 기인하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Jonathan은 Paley Brothers 이후 Brian Wilson(ex Beach Boys)이나 Jerry Lee Lewis 같은 뮤지션들과 보스톤/뉴욕 출신 펑크밴드들의 프로듀서로서 성공적인 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이 앨범은 후에 일본에서만 CD로 소량 재발매되었다.

글출처
http://www.punkblowfish.com/BlowfishPaley.htm

"Come Out And Pl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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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 출신의 The Laughing Dogs는 뉴욕 언더그라운드(뉴욕펑크) 밴드들의 컴필레이션 앨범 「Live at CBGB's」(1976)에 두 곡의 라이브 버전으로 참여한 후, 오랜 언더그라운드 생활을 끝내고 1979년에 첫번째 앨범 「Laughing Dogs」(1979)를 발표한다.

CBGB의 오너인 힐리 크리스탈도 극찬한 바 있는 역동적인 개러지 사운드는 아름다운 하모니의 파워팝 요소들이 들어오면서 조금 상쇄된 면이 있는 듯 하지만, 이는 속물적인 대중성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들로 평론가들의 극찬에도 불구하고 앨범의 인지도는 크게 상승하지 않았다

두번째 앨범까지 발표한 후 밴드는 해산했는데 두 앨범 모두 시디로 재발매 되지 않고 있다가 최근에 인디레이블을 통해 2 Albums On I CD 형태로 재발매 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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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Need A Million"


 "Round And Round"


 "Get 'Im Outta T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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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에로영감 2010/06/19 12:50

    아마 A's 랑 fabulous poodles 합본발매한데서 합본재발매되었을건데 오리지날 vinyl을 가지고는있지만 따로따로 재발되기를 바랬는데 합본으로 나오더군요. 최근 파워팝이 붐 정도는 아니더라도 약간 인기를 회복하고 있는데 음반시장이 죽어버려서 재발 나오더라도 다 저런식아니면 CD-R같은방식으로 많이 나오더군요.

  2. Punk77 2010/06/20 12:48

    A's도 시디발매가 되었군요!!
    좋은 음질로 재발매 되는 건 좋은데 될 수 있으면 오리지널 형태면 더 좋았을텐데 말이죠(따로 구매하는 경제적 부담이 문제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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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앨범 발매 전에 녹음되었던 데모테잎에서 음원을 추출한 10인치 부틀렉으로 앨범에 수록하지 않았던 미발표 커버곡들도 수록하고 있다. "Pills"는 Bo Diddley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는 E.McDaniels의 곡으로 첫번째 앨범에 수록됐다.

"Pil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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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3 01:49 2010/01/23 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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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M Records에서 발매한 Max's Kansas City 컴필레이션 두번째 시리즈로 첫번째 앨범에서 들려주었던 인상적인 모습들이 많이 줄었으며 각 밴드들의 독창성도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첫번째 앨범의 성공에 의존해 기획된 앨범이라는 느낌이 강하며 그 한계를 넘어서지는 못하고 있다.  

유튜브 영상은 첫번째 시리즈에 참여했던 Cherry Vanilla의 1977년 Musik Laden의 라이브 영상이다. Patti Smith나 Debbie Harry와 비교되기도 하지만 펑크로커로서 Cherry Vanilla쪽이 조금 더 매력적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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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RRY VANILLA - The Pu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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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27 21:52 2009/12/27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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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프랑스의 Kamera Records에서 발매된 12인치 45rpm EP로 1986년에 UK Kamera를 통해 재발매되기도 했다. 총 4곡의 데모가 담겨 있으며 오리지널 레코딩은 1972년 10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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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6 23:11 2009/03/16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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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punXLess 2009/03/23 21:30

    소닉유스걸로 처음들었고, 원곡으로만 알았습니다.

    그 당시만해도 TRASH듣고 공황상태에 빠져서

    '이런건 펑크도 아니고 뉴욕돌즈를 멀리하자'

    다짐했었는데

    Lonely planet boy 같은 경우는 정말 미친듯이 들었습니다.

    • Punk77 2009/03/24 02:39

      그 벨벳골드마인인가 거기서도 여자보컬 있는 어느 밴드가 연주하지 않았었나요.
      Lonely Planet Boy는 저도 정말 오래전부터 좋아했습니다. 뉴욕돌즈 최고의 곡이자 정말 명곡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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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AST

Band Information/#·A·B·C·D·E·F | 2007/05/10 14:27 | Punk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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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www.geocities.com/fasthomepage

1972년초 기타리스트 Miki Zone과 보컬리스트 Amand Zone 형제를 중심으로 결성됐다.
초기 글램록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뉴욕펑크의 기초를 다진 선구자적인 밴드로 뉴욕의 비슷한 성향의 밴드인 New York Dolls나 Wayne County등과 함께 Max's Kansas City를 중심으로 연주활동을 했다.

1975년말에는 Zone가의 또다른 형제 Paul Zone이 보컬리스트로 들어오고 Mandy가 키보디스트로 자리를 옮긴다.  (Paul Zone이 들어올 당시 Dee Dee Ramone이 밴드멤버가 될뻔 했다고 한다. Ramones는 70년대 중반 The Fast의 오프닝 밴드로 출연하기도 했다.) 76-77년 사이에 밴드는 글램/펑크적인 사운드와 스파이크헤어, 나찌장식물등의 글래머러스한 이미지로 뉴욕록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멀게는 미네아 폴리스 출신의 Replacements에게까지 영향을 끼쳤다.

The Fast는 70년대 중반 Max's Kansas City에서 활동하던 언더그라운드 밴드들의 모음집에 두 곡으로 참여한 후, 76-78년 많은 펑크밴드들이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하는 상황에서도 Max's Kansas City의 자체 레이블인 RAM과 계약중이었기 때문에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할 기회를 잃게 된다. (이 컴필앨범에 소속된 몇개의 밴드는 불행하게도 80년대가 되서야 데뷔앨범들을 발표했다. The Fast는 70년대 말의 평범한 펑크팝 스타일이 아닌 세련되고 에너지 넘치는 뉴웨이브 펑크를 들려준다. 지금 들어도 놀라운 사운드이다!)

1979년 펑크붐이 일어나면서 The Fast의 이름으로 보스톤의 The Rat이라는 클럽에서 연주를 하던 도중, 후에 The Cars의 보컬리스트가 되는 프로듀서 Ric Ocasek의 눈에 띄어 그의 초청으로 Electric Ladyland Studios에서 데뷰LP《For Sale》을 녹음한다.(이 앨범은 미키존 자신의 레이블을 통해 발표됐다.) 첫번째 앨범《For Sale》에서는 Max's Kansas City에 수록된 밴드 초창기의 2곡 이외에 Ric Ocasek이 프로듀스한 펑크팝 6곡이 수록되어 있다. 스완송에서 발매한 두번째 앨범《Leather Boys From The Asphalt Jungle》에서 밴드는 고딕풍의 록음악을 선보이는데 이때부터 Miki Zone 중심의 바이섹슈얼한 밴드의 이미지는 언론의 화제를 불러 일으키기 시작했다.

84년이 되면서 폴과 미키는 밴드를 완전히 해산하고 일렉트로훵크의 대부라고 불리우는 Man Parrish의 지원을 받으며 게이뮤직의 성향이 짙은 뉴웨이브풍의 신스팝 밴드 Man 2 Man을 결성한다. Man 2 Man의 곡들은 좋은 반응을 얻으며 점차 지명도를 높이기도 했으나 1986년 12월 31일 Miki Zone이 에이즈와 코카인 과다복용에 의한 합병증으로 사망하면서 위기를 맡이한다. 폴 존은 90년대 초까지 Man 2 Man으로 계속 활동했고 현재까지도 음악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고 한다.

원문: The Fast의 인터넷 팬페이지에서 발췌
http://www.geocities.com/fasthome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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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10 14:27 2007/05/10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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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SHALLS

Band Information/G·H·I·J·K·L·M | 2007/05/09 17:53 | Punk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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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말 결성된 Marshalls는 이전부터 Jonathan Richman, Ronne Blakely, Paley Brothers 등과 함께 자신들의 거주지인 보스톤을 중심으로 연주활동을 해 오고 있었다.

밴드의 프론트맨 Barry Marshall은 Jonathan Paley와 함께 뉴욕출신의 밴드 Mong에 함께 있으면서 CBGB를 중심으로 많은 활동을 하며 이후 뉴욕펑크의 출발점이 됐던 Television이나 Heartbreakers 같은 많은 뉴욕펑크밴드들에게 음악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이후 밴드는 Andy Paley의 주도 아래 몇곡의 데모테입을 녹음하며 메이저 레코드사의 관심을 끌었다.

Members:
Kevin Marshall(vocals, rhythm guitar), Barry Marshall(drums, vocals), Kenny Marshall(bass), Adam Roth(lead guitar), Andy Paley(dru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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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09 17:53 2007/05/09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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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TTI SMITH

Band Information/N·O·P·Q·R·S | 2007/05/08 13:52 | Punk77
일리노이주의 시카고에서 태어난 Patti Smith는 뉴저지에서 자라며 어릴적부터 Rolling Stones, Velvet Underground, Jimi Hendrix, James Brown 등의 음악에 심취한다. Patti의 주된 관심사는 시와 미술이었으며 Arthur Rimbaud, William Burroughs의 영향을 받은 초기 작품들은 Seventh Heaven(1971), Kodak(1972), Witt(1973)등의 작품집을 통해 발표되기도 했다.

70년대가 되자 Patti는 자신의 관심사를 록과 접목하려 시도했고 1971년, 기타리스트 Lenny Kaye를 만나 약 3년동안 듀엣으로 곡을 쓴다. 이후 Richard Sohl(piano)을 맞아들여 Patti Smith Group을 결성한다. 사진작가인 Robert Mapplethrpe(후에 많은 아티스트들의 사진작업을 담당한다.)의 전폭적인 재정 지원 아래 첫번째 싱글 "Hey Joe/Piss Factory"를 발표하며 1974년에는 뉴욕의 CBGB 클럽에서 가장 인기있는 그룹이 된다.
Ivan Kral(bass), J. D. Daughty(drums)가 새로 가입하며 첫 앨범《Horses》앨범을 발표하는데 John Cale에 의해서 프로듀스된 앨범은 Patti의 60년대 록에 대한 애정과 취향을 엿볼수 있었다. 이와 동시에 펑크의 인기가 폭발하며, Patti는 예전의 록음악팬과 새로운 팬 모두를 흡수하게 된다.

《Radio Ethiopia》앨범 역시 직선적인 태도는 여전했으나, 1977년초 무대 위에서 떨어져 발목뼈에 금이 가는 사고를 당하며 음악활동에 큰 지장을 초래하는 듯했다. 오랜 회복 기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으나 Patti는 금새 활동을 재개해 7월부터 활발한 라이브 활동을 가졌으며 다음해 발표된《Easter》는 상업적으로 커다란 성공을 거둔다. 이 앨범에는 Bruce Springsteen과 공동 작곡한 "Because The Night"이 실려있었는데 이곡은 UK Top 5를 기록한다. 그러나 다음에 발표된 《Wave》는 더이상 성공을 이어가지 못한다.

Patti는 전 MC5의 기타리스트인 Fred 'Sonic' Smith와 결혼하고 음악계를 떠난다. 그러나 1988년, 새앨범《Dream Of Life》를 들고 다시 나타나는데 "People Have The Power"같은 곡에서 여전히 이상이 변치 않았음을 입증했다.

이기선 (2003-09-23 16:32:34)
과연 미국은 Sex Pistols이상의 그 무엇을 갖지 못했을까? 그렇다고 해도 이미 모든 소스는 미국 자기에게 담겨져 있다. 왜 그것을 사람들은 모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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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08 13:52 2007/05/08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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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초 New York Dolls는 밴드의 기이한 모습으로 실력을 평가받지 못한 그룹이다. 그들에게 들려오는 것은 불명예 뿐이었으며 그들의 독특한 연주력은 평가대상에서 제외되곤 했다. 그러나 몇몇 비평가들에 의해 그들의 음악은 혁신적인 것으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이후 New York Dolls가 활동정지를 선언한 1974년 이후 그들의 행적을 아쉬워 하던 팬들은 78년 데이빗 요한슨 (David Johansen)의 새로운 솔로활동을 반갑게 맞이하기도 한다.

데이빗 요한슨은 뉴욕의 스테이튼 아일랜드 태생으로 그곳에서 쭉 자라왔다. 알다시피 스테이튼 아일랜드는 로큰롤이 특별히 인기 있었던 곳은 아니었다. 데이빗은 그때를 다음처럼 회상했다.

"나는 많은 형제들 사이에서 자랐다. 나의 형과 누나는 로큰롤에 빠져 있었는데, 내 나이가 4살쯤 되었을 때다. 나는 에벌리 브라더스(Everly Brothers)의 "Bye Bye Love"같은 곡을 따라 부르며 노래하길 좋아했다. 그리고 이후 본격적으로 로큰롤에 빠지기 시작한 때는 Gary U.S.Bond의 음악을 듣기 시작하면서 부터다. 나이가 조금 들어 스스로 자신을 챙길줄 알게된 이후부터 집에서 지긋지긋한 녀석으로 낙인찍혀 버렸다.나는 친구들과 그리니치 빌리지나 타임즈 스퀘어로 놀러가길 좋아했었는데 아무도 어린아이가 들어가는 것을 눈여겨 보지 않아 쉽게 출입할 수 있었다. 이후 십대가 되면서 음악에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10대 후반 New York Dolls를 결성,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팬들의 반응에 놀라기 시작햇다. 관중으로 있는 많은 아이들의 거친 모습들은 마치 미친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그들을 흥분시킬 만한 많은 요소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공연이 펼쳐지는 댄스홀의 모든 아이들은 놀라우리만큼 우리 음악을 좋아하는 매니아들이었으며 우리가 그들의 밴드가 된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우리의 연주는 뉴욕의 머서 아트 센터 (Mercer Art Center)에서 한밤중에 시작되곤 했다. 유머와 진지한 연주자세, 그리고 세상의 모든것을 경멸하는 가사는 일반적인 록밴드와는 확실히 구분되는 양상을 띄고 있었다."

많은 팬들의 형성으로 인해 New York Dolls는 머큐리 레코드와 계약을 체결했으며 곧 셀프타이틀 데뷰앨범 를 발표한다. 그러나 많은 공연활동 등의 홍보에도 그들의 음반 판매고는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했으며 이것 때문에 멤버들간에 개인적 문제를 야기시키게 된다. 자니 선더스(Johnny Thunders/guitar), 아서 케인(Athur Kane/bass),제리 놀란(Jerry Nolan/drums)과 함께 데이빗 요한슨(New York Dolls 시절에는 "H"란 이름으로 잘 알려짐)은 6인치나 되는 플랫폼 슈즈, 립스틱, 과다한 분장 등으로 영국 팬들에게 선보였지만 여성인지 남성인지 구분할 수 없는 그들의 용모에 혼동스러워 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클럽에서 연주하려고 들러갈 때 우락부락하게 생긴 클럽 매니저나 출연 계약을 맺은 에이전트사로부터 기회를 박탈 당하기도 한다. 한 예로 74년 로스엔젤레스의 록시 클럽에서 있었던 일인데 무례한 행동과 공연 예정시간에 도착하지 않아 공연을 하지 못하게 됐는데 이 당시 상황을 데이빗은 그들의 매니지먼트사가 밴드의 홍보를 제대로 하지 못해 벌어진 일이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우리는 록시클럽 매니저가 얘기한 것처럼 공연시간에 늦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하던대로 행동했다. 우리는 단지 즐겁게 하려고 했을 뿐인데.... 그들은 우리의 팬들을 어떻게든 얌전하게 만들려고 했다. 우리를 이상하게 보았으며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나는 모욕을 당한것 같아 기분이 몹시 안좋았다. 예전에 시골에서 그런 경우를 당한 적은 있지만 이런 대도시에는 처음이었다."

75년 New York Dolls의 해체후 많은 미디어에서는 데이빗 요한슨의 거취에 대해서 주목하기 시작했으며, 데이빗 자신도 음악계에 새로 진출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77년CBS산하의 블루 스카이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고 리차드 로빈슨(Richard Robinson)의 프로듀스로 앨범제작에 들어간다. 그의 셀프 타이틀 솔로 데뷔앨범《David Johasen》은 78년에 나왔는데 곧 영국과 미국으로 투어를 떠난다. 예전의 화려한 메이크업을 하지 않은 채 드리고 독특한 의상도 입지 않은 채 음악으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준 공연을 끝낸 데이빗은 이후 New York Dolls의 전 멤버였던 실베인 실베인 의 도움으로 2집을 만들게 되며 "Funky But Chic", "Frenchett", "Lonely Tenement"등을 발표한다.

새로운 앨범《In Style》은 79년에 발매되는데 그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던 R&B, 소울, 레게에 영향을 받은 많은 곡들을 발표하게 되는데 그중 "Melody", "Swahheto Woman", "Flamingo Road"를 대중에게 널리 알린다. 이 앨범은 그의 작곡 실력이나 레코드 뮤지션으로서 많은 발전을 이룬 앨범으로 평가받게 되며 판매면에서도 좋은 성과를 올려 소속 레코드사를 기쁘게 한다. 세번째 앨범《Here Come The Night》은 음악적 발전을 볼 수 있는 앨범이었지만 예전같은 호평을 얻어내지는 못한다. 대부분의 곡을 전 비치 보이스의 멤버였던 블론디 채플린과 같이 만들었는데 "You Fool For You", "My Obsession", "Here Comes The Night" "Rollin' Job"등이 그들의 작품이며 블론디는 이 음반에서 기타와 백킹보컬로 참여해 주기도 했다. 데이빗은 조롱하는 투로 자신의 세번째 앨범에 대해 다음처럼 말했다.

"나는 이 앨범을 이웃인 윌리에게 바치겠다.우리가 새 앨범을 위해 아파트에서 리허설을 하고 잇을때(기타 두대, 베이스 한대, 피아노, 오르간, 드럼머신을 가지고), 윌리는 항상 말하길 '오우, 당신네들이 이사하는 소리가 들리는군!' 나는 나중에서야 그 소리가 무슨 뜻인지 알았는데, 그것은 시끄러운 소음을 만드는 우리를 작당해서 쫓아내려는 음모였다. 그래서 내 방의 문고리에 다음처럼 쓴 쪽지를 걸어놓았다. '이 방은 당신처럼 살기 위해 빌린 것이지 절대 스튜디오용으로 빌린 것이 아님.' 결국 리허설 작업은 스튜디오를 빌려 작업했으며 순조롭게 작업은 진행해 갔지만 이말은 꼭 남기고 싶었다."

다음 앨범인 라이브 앨범《Live It Up》은 미리 만들어진 곡을 새롭게 편곡해 담은 모음집 형식이 아니라 라이브 앨범으로 발매했다. 앨범에는 애니멀스의 곡들을 메들리로 만든 곡 "Build Me Buttercup"이 미국 차트에서 오랫동안 머물기도 한다. 다음 앨범인 라이브 앨범《Live It Up》은 미리 만들어진 곡을 새롭게 편곡해 담은 모음집 형식이 아니라 라이브 앨범으로 발매했다. 앨범에는 애니멀스의 곡들을 메들리로 만든 곡 "Build Me Buttercup"이 미국 차트에서 오랫동안 머물기도 한다. 80년대 중반 데이빗은 맨하튼 연예계에 진출해 버스터 포인덱스터(Buster Poindexter)라는 예명으로 여러 나이트 클럽에서 연주를 하기도 했다. 86년 3월까지 아무런 솔로앨범을 발표하지 않았을때, 머큐리 레코드사는 초기 New York Dolls의 곡들을 담은 앨범 《Night Of The Living Dolls》란 타이틀로 발매하기도 한다. 87년 데이빗은 RCA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Buster Poindexter》를 발표하며 미국 종단 투어를 펼친다. 이 앨범에 대해 데이빗은 이렇게 평했다.

"많은 나의 곡들은 나의 레코드에서 얻은 많은 다양한 장르에서 영향받은 곡들이 많았는데 그러한 것들은 나의 록 콘서트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이후 예전 동료 두명과 함께 집 근처의 트램프(Tramp)라는 바에서 연주하며 많은 곡들을 만들어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연주하던 대부분의 곡들을 라이브에서 연주했으며 앨범에 수록했다. 이 앨범은 87년에서 88년까지 빌보드 차트에 머물기는 하지만 베스트 셀러가 되지는 못한다. 이후 88년 데이빗은 영화《Candy Mountain》에서 자신을 보여주기도 한다.

출처 <핫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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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07 12:01 2007/05/07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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