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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성자와 체제 옹호자의 두 얼굴 | 원제 The Mahatam and the Ism
마하트마 간디 불편한 진실
E. M. S. 남부디리파드 (지은이) | 정호영 (옮긴이) | 한스컨텐츠(Hantz)

















진보적 관점으로 간디를 조명한 간디 평전.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완전무결한 ‘성인’이 아니라 문제적 인물, 논쟁적 인물이였던 간디에 대해 인도 진보운동의 거목 남부디리파드가 냉철한 비판지성과 깊은 존경심으로 써내려간 책이다. 작가는 텐둘카르의 전기를 레퍼런스로 준용하고 사회적, 역사적 맥락, 국내외 경제 상황과 국제 정세의 변화를 고려해 간디의 유산과 공과(功過)를 총체적으로, 균형 있게 밝힌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식민지 인도 청년들을 총알받이로 징병해 사지로 내몬 사람, 바가트 싱을 비롯해 여러 혁명가들을 서둘러 처형해 달라고 영국 정부에 요청한 사람, 통념과 달리 정치적 목적에 따라 때로는 대중 폭동을 조장하고 방치한 사람, 민주적 절차에 따라 인도국민회의당(이하 ‘국민회의’) 의장이 된 수바스 찬드라 보세에게 압력을 가해 사퇴시키고 결국 쫓아낸 사람. 이 사람은 충격적이게도 마하트마 간디와 동일 인물이다.

남부디리파드는 간디를 평가하려면 간디의 생애와 업적을 총체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논점과 부합하는 근거만을 필요에 따라 발췌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간디가 남긴 저서들, 수많은 어록, 행보 등을 빠짐없이 추적해야 하며, 이를 당시의 사회적, 역사적 맥락과 민족운동의 다양한 국면 속에서 면밀히 분석할 때 올바른 평가가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이 책은 D. G. 텐둘카르의 방대한 간디 전기인 <마하트마: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의 생애(Mahatma: The Life of Mohandas Karamchand Gandhi)>(全8권)를 주요 레퍼런스로 삼는다. 텐둘카르의 간디 전기는 분량도 분량이거니와, 간디가 직접 아주 세세한 부분, 즉 전기의 형식, 삽화, 맞춤법, 심지어 하이픈까지 검토하고 의논한 것이기 때문에 정전(正傳)으로서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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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글
간디에 대한 E. M. S. 남부디리파드의 입장 ? 프라카시 카라트(CPIM 총서기)
재판 서론(1959년)
재판 서문(1981년)

서론
초창기
비협력운동
첫 번째 불화
푸르나 스와라지
소금 사티아그라하 국면
은퇴
통일 전선
공직 수락과 그 이후
운영위원회와의 충돌
Quit India와 그 이후
8월 15일 : 승리인가 패배인가?
간디주의의 의미
간디 이후의 간디주의
제도화(1981년)
간디 암살의 정치학(1998년)

[부록] - 정호영(옮긴이)
간디 중심의 국민회의 역사에서 벗어나기
현재 인도에서의 부단운동
이 책을 위한 짧은 연표
지은이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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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E. M. S. 남부디리파드    

최근작 : <마하트마 간디 불편한 진실>
소개 : 20세기 인도를 대표하는 좌파 정치인. 케랄라 주 총리를 두 차례 역임했다. 조국의 독립, 카스트 차별 철폐, 토지개혁, 문맹 타파, 경제발전에 일생을 바쳤으며, 민중을 향한 한결같은 헌신과 청렴한 삶, 높은 학식과 덕망으로 좌우를 넘어 두루 존경받았다.
1909년 최상층 카스트인 브라만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부터 카스트 차별주의 및 보수주의와 맞서 싸웠다. 1931년 독립 투쟁에 뛰어들어 사티아그라하운동을 벌이다 투옥되었으며, 1934년 인도국민회의 전인도공동서기가 되는 등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하지만 간디주의 및 국민회의와 결별하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향한 혁명의 길을 걸었다. 인도공산당(CPI) 중앙위원과 정치국원을 거쳐 총서기를 지냈으며, 1964년 인도마르크스주의공산당(CPIM)으로 당적을 옮겨서도 오랫동안 중앙위원과 정치국원, 총서기를 역임했다. 그는 인도를 대표하는 좌파 이론가 겸 저널리스트로도 명성이 높았다.
1939년 마드라스 주 의회 의원을 지낸 바 있는 그는 1957년 인도공산당을 이끌고 나선 케랄라 주 선거에서 승리해 초대 주 총리로 선출되었다. 이는 세계 최초로 민주 선거에 의해 공산당이 집권한 사례이자, 인도 독립 후 처음으로 비(非)국민회의가 집권한 사례였다. 하지만 케랄라 공산당 정부를 눈엣가시로 여겨 헌법 독소조항인 356조를 발동한 중앙정부에 의해 2년 만에 강제 해산되었다.
그러나 1967년 선거에서 무슬림연맹 등 7개 정당 연합으로 집권해 다시 주 총리를 역임했다. 집권하지 못했을 때는 케랄라 주 의회 야당 대표로 활동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아마르티아 센은 그가 수행한 케랄라 모델을 개발경제의 모범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명문가 브라만 출신으로서는 드물게도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무산계급을 위해 일생을 바친 데서 보듯, 그의 삶은 희생과 소박함 그 자체였다. 그는 감옥과 의회, 지하활동과 주 총리를 오가며 반세기 넘게 정치가, 혁명가, 이론가의 길을 걸은 인도 진보정치의 거목이었다.

역자 : 정호영    

최근작 : <마하트마 간디 불편한 진실>,<인도는 울퉁불퉁하다>,<섹스 피스톨즈 조니로턴> … 총 6종 (모두보기)
소개 : 인도 콜카타에 있는 자다푸르대학(Jadavpur University) 사회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라마크리슈나 미션(http://www.sriramakrishna.org)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편, 인터내셔널 밴드의 멤버로도 활동 중이다.

공부하러 인도에 가기 전에는 10년 넘게 방송 및 전산 관련 회사에 다녔다(물론 이직을 거듭했다). 직장생활을 하지 않았을 때는 엔지니어 사이트 mcp.co.kr, 한국 최초의 인디음악 사이트 ‘아름나라 음악마을’을 동시에 운영했으며, 네이트 재즈 동호회 시삽을 맡기도 했다. 또한 《서준식 옥중서한》(개정판), 《마이크로소프트의 도전: X박스와 게임의 미래》를 비롯해 인문, 사회과학, 대중문화, 전산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기획했다.

지은 책으로는 《인도는 울퉁불퉁하다》, 《양방향 TV를 위한 디지털 컨텐츠 매니지먼트》(공저), 《맨땅에 헤딩하리라》(공저)가 있고, 옮긴 책으로는 《섹스 피스톨즈 조니 로턴》, 《한대수 침묵》, 《디지털 TV 핸드북》,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의 《붉은 사랑》(근간)과 《위대한 사랑》(근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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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관점으로 간디를 조명한 최초의 책!

인도 진보운동의 거목 남부디리파드가
냉철한 비판지성과 깊은 존경심으로 써내려간
간디의 생애와 유산

간디(1869-1948)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20세기 전반기, 인도 민족운동의 지도자이자 구심점이었던 간디는 인도의 국부(國父), 인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으로 추앙받는다. 어디 인도에서뿐인가. ‘모한다스 카람찬드(Mohandas Karamchand)’란 본명 대신, ‘위대한 영혼’이란 뜻의 ‘마하트마(Mahatma)’로 불리는 그는 비폭력의 성자(聖者), 20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성인(聖人)으로 전 세계에서 추앙받는 인물이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일찍부터 자서전과 위인전이 여러 종 나와 널리 읽히고 있다.
간디에 대한 존경은 상이한 정치적 성향의 벽도 쉽게 뛰어넘는다. 간디의 전매특허나 다름없는 비폭력 저항, 단식 투쟁, 무소유 등은 각국의 독립운동, 민주화운동, 사회개혁운동 등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정치 무관심층부터 정치 과잉층까지, 중도우파부터 중도좌파, 무정부주의자까지 간디에 대한 평가는 ‘만장일치’, ‘이구동성’에 가깝다. 정말 간디는 신격화될 정도의 인물이었을까.

간디의 두 얼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식민지 인도 청년들을 총알받이로 징병해 사지로 내몬 사람, 바가트 싱을 비롯해 여러 혁명가들을 서둘러 처형해 달라고 영국 정부에 요청한 사람, 통념과 달리 정치적 목적에 따라 때로는 대중 폭동을 조장하고 방치한 사람, 민주적 절차에 따라 인도국민회의당(이하 ‘국민회의’) 의장이 된 수바스 찬드라 보세에게 압력을 가해 사퇴시키고 결국 쫓아낸 사람. 이 사람은 충격적이게도 마하트마 간디와 동일 인물이다.
충격적이란 말이 충격적이지 않다면, 우리 역사에 대입해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징병관을 자처해 태평양전쟁 참전을 독려한 사람, 안중근 의사와 윤봉길 의사 등 독립 열사들을 서둘러 처형해 달라고 조선총독부와 일본 정부에 요청한 사람, 때로는 조선통감과 협상을 하기 위해 조선 민중들의 시위와 희생을 조장하고 방치한 사람...... 그렇다면 우리에게 알려진 마하트마 간디는 허상이었던 것일까.
간디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완전무결한 ‘성인’이 아니라 문제적 인물, 논쟁적 인물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인도 민중들을 하나로 묶어낸 탁월한 독립운동 지도자이자, 독립 후 국민회의 동료와 수하들이 부정부패에 물들어갈 때도 끝까지 청렴함을 잃지 않았던 인물로 위대함에 대해서는 거의 이견이 없지만, 앞서 예로 든 ‘다른 얼굴’에서 보듯 그가 걸어간 길과 그가 남긴 업적에 대해 이견 또한 적지 않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을 뿐이다.

가장 권위 있는 간디 평전 중 하나

이 책의 저자 E. M. S. 남부디리파드(1909-1998)는 20세기 인도를 대표하는 좌파 정치인이다. 1957년 인도공산당(CPI)을 이끌고 나선 케랄라 주 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세계 최초로 민주 선거에 의해 공산당이 집권한 사례이자 인도 독립 후 처음으로 비(非)국민회의가 집권한 사례를 이끈 주역이었으며, 케랄라 주 총리를 두 차례 역임하고 인도공산당 총서기, 인도마르크스주의공산당(CPIM) 총서기를 지낸 좌파 거목이었다.
E. M. S. 남부디리파드는 반세기 넘게 진보운동에 헌신한 20세기 인도 좌파의 대표적 정치가였지만, 그 역시 동시대 다른 청년들처럼 청년 시절엔 열렬한 간디주의자였다. 간디의 사상과 지도에 깊이 공감해 독립운동에 뛰어들며 정치에 입문했고 일찍부터 국민회의 내 급진파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하지만 그는 마르크스주의자로 도약해 간디 및 간디주의와 결별했고, 이후 숨을 거둘 때까지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위한 길을 걸어갔다.
그렇다면 남부디리파드는 좌파의 관점에서만 간디를 평가했을까. 간디주의자로 출발해 마르크스주의자로 도약했지만 간디에 대한 깊은 존경심은 끝까지 간직했다는 점에서 남부디리파드는 독특한 위치에 있었다. 그는 간디를 성인으로 무조건 신화화하는 관점을 거부한다. 동시에 “혁명 전선에서 우리 민족운동의 발전을 가로막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던 반(反)혁명 분자”라며 오로지 우익 부르주아 지도자로만 폄하하는 관점도 거부한다. 물론 그는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해 간디를 부르주아 정치 지도자로 바라보았지만, 간디의 위대함까지 깎아내리는 일부 좌파의 편협한 시각 역시 거부했다.
남부디리파드는 간디를 평가하려면 간디의 생애와 업적을 총체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논점과 부합하는 근거만을 필요에 따라 발췌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간디가 남긴 저서들, 수많은 어록, 행보 등을 빠짐없이 추적해야 하며, 이를 당시의 사회적, 역사적 맥락과 민족운동의 다양한 국면 속에서 면밀히 분석할 때 올바른 평가가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책 《마하트마 간디 불편한 진실(원제: The Mahatam and the Ism)》이다.
남부디리파드는 D. G. 텐둘카르의 방대한 간디 전기인 《마하트마: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의 생애(Mahatma: The Life of Mohandas Karamchand Gandhi)》(全8권)를 주요 레퍼런스로 삼는다. 텐둘카르의 간디 전기는 분량도 분량이거니와, 간디가 직접 아주 세세한 부분, 즉 전기의 형식, 삽화, 맞춤법, 심지어 하이픈까지 검토하고 의논한 것이기 때문에 정전(正傳)으로서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남부디리파드는 텐둘카르의 전기를 레퍼런스로 준용하고 사회적, 역사적 맥락, 국내외 경제 상황과 국제 정세의 변화를 고려해 간디의 유산과 공과(功過)를 총체적으로, 균형 있게 밝힌다. 이 책이 1958년(간디 사후 10주기)에 초판이 발간된 이래, 간디(주의)에 관한 권위 있는 선구적 저작으로 평가받으며 지금도 널리 읽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간디가 힌두 극우에 의해 암살된 지 60년이 넘었지만 간디와 간디주의의 영향력은 지금도 지대하다. 간디에 대한 국민적 추앙심과는 별개로, 인도 극우 정치인들이 제 입맛대로 간디를 호명해 폭력적 왜곡을 자행하기 일쑤다. 간디는 말년에 죽음을 각오하고 힌두와 무슬림의 꼬뮤날리즘(Communalism, 분열주의, 종교광신주의)과 맞서 싸우다 암살당했지만, 지금도 인도는 여전히 꼬뮤날리즘 세력들이 간디 혹은 반(反)간디의 이름으로 가하는 폭력과 테러가 횡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책이 ‘어제의 인도’뿐 아니라 ‘오늘의 인도’를 알기 위해서도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인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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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13 22:47 2011/08/13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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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점자본의 이데올로기 지배

이른바 ‘박정희 근대화론’, 그러니까 ‘박정희가, 비록 독재자였지만, 한국경제를 근대화시켰고, 즉 한국경제를 발전시켰고, 그리하여 우리가 잘 살게 되었다’는 주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이 글의 주제이다.

그런데, 저들 ‘박정희 근대화론자들’의 그러한 주장은 사실은, 그 내용의 당부를 굳이 세세히 따지지 않더라도, 무언가 얼토당토않은 헛소리임을 한눈에 금세 알 수 있다.

다름 아니라, 저들의 주장처럼 박정희 덕분에 우리가 잘 살게 되었다면, 박정희는 왜 그토록 대중의 대대적인 저항에 부딪혀 그토록 비참한 최후를 맞아야 했을까?

독재를 했기 때문에?
박정희의 독재는 분명 한줌 소수에 의한 절대 다수에 대한 독재, 그것도 절대 다수에 대한 참으로 극악한 독재였다. 그리고 직접적으로는 바로 그 때문에 그는 절대 다수 대중의 대대적인 저항에 부딪혔고, 그리하여 그러한 비참한 최후를 맞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 저들의 주장처럼 박정희 덕분에 우리가 잘 살게 되었다면, 박정희는 왜 그렇게 극악한 독재를 필요로 했던 것일까?

저들 ‘박정희 근대화론자들’은 이렇게 대답하고 싶을지 모른다. ― ‘백성이 어리석어서 박정희 덕에 잘 살게 된 것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자신들은 ‘그 어리석음을 일깨워주고 있는 중’이라고.

그리고 실제로 저들은 ‘백성은 어리석으며, 그 때문에 박정희 덕분에 잘 살게 된 것처럼 그들을 세뇌시키면 된다’고 믿고 있을 터이고, 바로 그 때문에 그 이른바 ‘박정희 근대화론’을 주장하고 있을 터이다.

그런데 이렇게 천박하디천박하고 얼토당토않은 주장이, 다른 한편에서는 상당한 대중적 공감을 사고 있고, 그리하여, 직접적으로 박정희 패거리의 잔당 혹은 후계자들에 불과한 세력, 한나라당이 가히 ‘민주화되었다’는 오늘날에도 버젓이 ‘집권’ㆍ지배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애비의 ‘후광’을 빼놓고는 무엇 하나 번번히 내놓을 게 없는 그의 딸 박근혜가 차기 ‘대권’의 가장 유력한 후보이기도 한 것이 또한 오늘날 이 사회의 현실이기도 하다.

천박하디천박하고 얼토당토않은 주장이 이렇게 상당한 대중적 공감을 사고 있는 이 사회 분위기, 그것은 도대체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 부르주아지의, 독점자본의 이데올로기 지배, 박정희 패거리와 그 후계자들의 이데올로기 지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즉각 반박하고 싶어 할지 모른다. ― “당신도 결국은 ‘대중이, 백성이 어리석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의 형식만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내용은 전혀 다르다. 아니, 정반대이다.

박정희 시대에도 지금도 학교 교육에서 각종 언론 매체에 이르기까지 이 사회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 생산ㆍ전파수단을 장악하여 지배하고 있는 것은 부르주아지이고, 그 중에서도 독점자본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그들의 이해에 따라 생산하여 전파하는 이데올로기가 이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이다. 실로 맑스와 엥겔스가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대로인 것이다.

지배 계급의 사상(Gedanken)이 어느 시대에나 지배적인 사상이다. 즉, 사회의 지배적인 물질적 권력인 바의 계급이 그 사회의 지배적인 정신적 권력이다. 물질적 생산을 위한 수단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계급은 그와 동시에 정신적 생산을 위한 수단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며, 그 때문에 또한 정신적 생산을 위한 수단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에 종속되어 있다. 지배적 사상이란 지배적인 물질적 관계의 관념적 표현, 사상의 형태로 표현된 지배적인 물질적 관계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니며, 따라서 그것은 실로 하나의 계급을 지배계급이게 하는 관계의 관념적 표현, 따라서 이 계급의 지배의 사상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니다. (K. 맑스ㆍF. 엥겔스, <<독일 이데올로기>>, MEW, Bd. 3, S. 46.)

어떤 시대의 지배적인 관념(Ideen)은 언제나 단지 지배계급의 관념이었다. (K. 맑스ㆍF. 엥겔스, <<공산당 선언>>, MEW, Bd. 4, S. 480.)

“물질적 생산을 위한 수단들을 마음대로” 하고 있는 저들 박정희와 그 패거리들, 그들의 잔당, 후계자들인 독점자본이 예나 지금이나 “정신적 생산을 위한 수단들을 마음대로” 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또한 정신적 생산을 위한 수단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사상은”, 이 사회 노동자ㆍ민중의 사고는 그들 “지배계급의 사상에 종속되어” 왔고,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저들의 이데올로기 지배 때문에 저들의 천박하디천박하고 얼토당토않은 주장으로서의 이른바 ‘박정희 근대화론’이 이 사회에서 상당한 수의 대중의 공감을 사고 있고, 그러한 허위관념이 다시 저들로 하여금 계속 이 사회를 지배할 수 있게끔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논거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것이 바로 ‘대중이 어리석었기 때문에’, 즉 ‘박정희 덕분에 잘 살게 되었다는 것을 대중이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대중에 대한 독재가 필요했고, 대중의 저항이 있었다’고 말할 수 없는 논거이기도 하다.

여기에서의 주요 주제가 아니기 때문에 단지 간단히 지적하고 지나갈 수밖에 없지만,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지배, 그 사고ㆍ사상의 지배가 얼마나 압도적인가는 오늘날 이 독점부르주아 사회의, 따라서 우리 사회의,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들’ㆍ‘진보정당들’과 그 활동가들의 사고ㆍ사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해보면 절감할 수 있다. 그들 대부분의 대(對)북ㆍ대(對)쏘ㆍ대(對)20세기 사회주의에 대한 적대적 사고ㆍ사상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오늘날 가장 ‘진보적’이라는 지식인들이나 정당들, 언론들이 ‘진보적 기획’이라고 내세우는 소위 ‘기본소득’론이나 ‘노동자 주식소유제(종업원지주제, 우리사주제)’, ‘노동자 경영참가’론 같은 담론들이 얼마나 반동적이며 독점자본의 이해에 봉사하는 것인가를 알면, 독점자본의 이데올로기 지배력에 가히 소름이 끼칠 것이다. 최근 신영복 교수 같은 지도적 지식인들과 <<한겨레>> 신문 등이 열심히 설교하고 있는 소위 ‘사회적 기업(가)’론 역시 그렇게 반동적이고 독점자본의 이해에 봉사하는 자본의 이데올로기이다.


2. 착취와 수탈, 빈곤화를 은폐ㆍ미화하는 ‘근대화’ 담론

그런데 소위 ‘박정희 근대화론’이란 것이 이렇게 천박하디천박하고 얼토당토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많은 사람들은 하나의 사실 앞에서 당혹감을 느낀다. 다름 아니라, 아무튼 박정희 치하에서, 특히 박정희의 독재가 ‘유신체제’라는 이름으로 극에 달했던 1970년대에 ‘한국경제’가 엄청나게 발전했다는, 엄청나게 ‘근대화’되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실제로 박정희 치하의 1960년대와 특히 1970년대에는 ‘한국경제’가, 구차하게 통계 수치를 들 것도 없이, 엄청나게 발전했고, 엄청나게 근대화되었다. 이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보다도 더 설득력이 없고, 따라서 ‘박정희 근대화론’에 비판적인 많은 사람들이 당혹감을 느끼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이 1960년대, 그리고 1970년대의, 그리고 사실은 그 이후 오늘날까지 기본적으로 지속되고 있는 ‘한국경제’의 이 엄청난 발전 혹은 ‘근대화’와 관련하여, 보다 정확하게는 한국 자본주의의 비약적 발전과 관련하여 그 원인과 동력, 그리고 그 속에서의 박정희 패거리의 역할은 무엇이었는가 하는 문제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은, 특수하게는, 한국의 현대사의 진실은 무엇이(었으)며, 일반적으로는, 자본주의란 무엇이고, 그것이 급속하게 발전하는 조건, 혹은 그 원인과 동력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귀착된다.

그런데, 이들 문제에 대해서 논급하기 전에 먼저 저들이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 그 교활한 방식에 대해서 간단히 고찰해보자.

저들 박정희 찬양자들은 대개 문제를, 박정희 세력이 “한국을, 혹은 한국경제를 근대화시켰다”는 식으로 제기한다.

예컨대, 보도(<<한겨레>> 2011. 3. 15.)에 의하면, “5·16 쿠데타 50돌을 맞아 ‘민주ㆍ평화ㆍ복지포럼’(상임대표 이부영)이 [3월] 14일 주최한 ‘5ㆍ16, 우리에게 무엇인가?’ 토론회에서” 서울대학교의 전상인 교수는, “박정희 시대 18년은 장기적ㆍ결과적으로 한국의 근대화 혁명을 성취한 과정이었다”며, “‘5ㆍ16은 단기적 관점에서 보면 분명히 쿠데타지만, 5ㆍ16세력이 민족사적 빈곤을 극복하고 대한민국의 경제기적을 이끌어냈기 때문’에 ‘사후적 정당성’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식의 주장은, 일본의 극우세력이 일제의 조선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들이 ‘식민지 지배를 통해 조선을 근대화시켰다’고 주장하는 것과 정확히 같은 방식이다.

조선이 혹은 한국이 ‘근대화된’ 것인가, 저들이 조선을 혹은 한국을 ‘근대화시킨’ 것인가 하는 문제는 잠시 차치하더라도, 저들은 자신들이 조선을 혹은 한국을 ‘자본주의화시켰다’거나, 조선의 혹은 한국의 ‘자본주의를 발전시켰다’고는 결코 주장하지 않는다. 저들은 으레 ‘한국 자본주의’라는 용어 대신에 ‘한국경제’라는 용어를, 그리고 ‘자본주의화시켰다’는 표현 대신에 ‘근대화시켰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다.

‘자본주의화시켰다’거나 ‘자본주의가 발전했다’고 표현하면, 거기에는 생산수단을 사적으로, 즉 독점적ㆍ배타적으로 소유하는 지주 및 자본가계급과 생산수단의 소유로부터 배제된 무산자로서의 노동자계급으로 사회가 계급적으로 분열되고 그에 따라 착취와 수탈, 노동자ㆍ농민을 비롯한 근로인민의 빈곤, 고통, 무지, 타락 등이 심화되었다는 뜻이 내포된다. 그에 반해서 ‘근대화시켰다’거나 ‘근대화되었다’고 표현하면, 이는 표면상 몰계급적인 표현으로서 그러한 내용이 일체 배제된다. 그러나 그것이 몰계급적인 것은 단지 표면상 그러할 뿐이지, 실제로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즉 바로 그렇게 계급적 분열과 착취, 수탈 등을 모두 은폐ㆍ미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철저히 착취ㆍ수탈자계급, 독점자본의 이해에 봉사하는 것이고, 그만큼 철저히 계급적인 표현방식이다.

그리하여, 저들이 박정희와 그 패거리들이 한국경제를 ‘근대화시켰다’고 주장하는 것도, 다름 아니라, 자본주의화 혹은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른 착취와 수탈의 강화, 노동자ㆍ농민을 비롯한 근로인민의 빈곤화 등을 ‘근대화’란 말로써 은폐ㆍ미화하기 위해서이다.

게다가 ‘자본주의’라고 하면, 저들이 그 주기적 필연성을 인정하고자 하든 하지 않든, 공황이라는 주기적인 위기, 주기적인 노동자ㆍ인민대중의 빈곤화 기구가 거기에 포함된다. 그런데 그것을 ‘근대화’라고 표현하면 그런 것들이 일절 배제된다.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에 저들 ‘근대화론자들’은 교활하게도 문제를 그렇게, 즉 ‘자본주의’가 아니라 ‘근대화’로 제기한다.


3. 한국 자본주의의 비약적 발전의 원인과 배경

앞의 전상인 교수의 발언에서도 확인한 것처럼, 박정희 찬양자들은 박정희와 그 패거리들이 “대한민국의 경제기적을 이끌어냈(다)”고 주장한다. 즉, 한국 자본주의의 비약적 발전이 박정희와 그 패거리의 정치적 지도력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역사 서술, 즉 어떤 영웅적 인물이 이렇게 저렇게 사회를 발전시켰다는 식의 역사 서술은 가장 전통적이고, 또 언뜻 보기에는 설득력 있게 들리는 역사 서술 방식이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 서술 방식은 사실은 역사와 사회 역시 자연과 마찬가지로 법칙적으로 운동하고 발전한다는 사실에 무지한, 혹은 그러한 운동법칙을 부인하는 가장 비과학적인 역사 서술 방식이다. 일상화되고 발전한 계급투쟁 때문에 더 이상 과학적일 수 없게 된 비과학으로서의 현대 부르주아 역사ㆍ사회과학이 애용하는 서술 방식이기도 하다.

예컨대,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것과 같은 경제공황은 발전한 자본주의적 생산에 필연적이고 주기적이라는 사실을 극구 부인하면서, 공황의 원인은 ‘정책 실패’라고 주장한다. 끝없는 정책연구, 정책수정이 공황의 주기적 엄습을 결코 막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역사적 경험인데도 언제나 그렇게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역사적ㆍ사회적 조건 때문에 한국 자본주의가 자본주의 발전의 법칙에 따라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고 보는 대신에 박정희와 그 패거리들의 어떤 정치적 지도력, 정책 때문에 발전했다고 보는 것도 바로 그러한 부르주아적 비과학, 치매의 표현에 불과하다.

결국 한국의 자본주의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일정한 배경과 조건 때문에 그 자체가 발전한 것이지, 박정희나 그 패거리들이 발전시킨 것이 아니다. 그 발전과정 속에서 박정희나 그 패거리들, 혹은 어떤 개인의 역할이 아무리 능동적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역사적ㆍ사회적, 그리고 정치ㆍ경제적 조건이 그들을 역사의 도구로 삼아 그렇게 역할 하도록 한 것이지 그 반대, 즉 그들이 그 조건들을 지배하고 창출한 것이 아니다.

박정희나 그 패거리들이 한국 자본주의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그 비약적 발전의 역사적 도구에 불과했다는 것은, 즉 그들이 아니었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그들이 그 발전과정에서 수행했던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박정희 패거리들이나 그 찬양자들이 마치 박정희 정권의 공적인 것처럼 내세우는 이른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란 것이 사실은 그들이 쿠데타로 뒤집어엎은 민주당 장면 정권에 의해서 이미 추진되고 그 대강이 성안된 것이라는 사실에 의해서도 알 수 있다.

그러면 한국 자본주의는 어떻게 해서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는가?


소농의 창출, 그 몰락과 저임금 노동자의 창출

그 비약적 발전은 당연히 여러 요인들이 작용한 결과이지만, 그 발전의 무엇보다도 본질적이고 결정적인 요인은 농지개혁을 통한 봉건적 생산관계의 해체, 봉건적 지주-소작관계의 철저한 해체이다. 그리고 이는 기본적으로 박정희나 그 패거리들의 정권과는 무관하게 이미 1940년대 말부터 시작되어 1950년대에 걸쳐 이루어진 작업이었다. 더구나 그것은, 형식적으로는 위로부터, 즉 국가 주도로 이루어졌지만, 사실은 폭력적인 농민혁명의 폭발을 회피ㆍ모면하기 위한 마지못한 조치였고, 따라서 실질적ㆍ내용적으로는 아래로부터의 농민의 압력에 의한, 비록 선제(先制)당했지만 일종의 농민혁명의 결과였다.

1940년대 말에서 1950년대에 걸쳐 농지개혁이라는 농민혁명을 통해 지주-소작관계라는 봉건적 생산관계를 철저히 해체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은 그러한 봉건적 생산관계 속에서 발전한 생산력이 이제 더 이상은 그 생산관계와 양립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새로운 사회로 발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맑스는 저 유명한 <<경제학 비판>>(1859년)의 ‘서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은 그 발전의 어떤 단계에서 그것이 그때까지 그 내부에서 운동해온 기존의 생산관계와, 혹은 그 생산관계의 법률적 표현에 불과한 것인 소유관계와 모순에 빠지게 된다. 이들 관계들은 생산력의 발전형태들로부터 그 질곡으로 일변한다. 그때에 사회혁명의 시기가 시작된다. 경제적 기초의 변화와 함께 거대한 상부구조 전체가 혹은 서서히, 혹은 급격하게 변혁된다. 이러한 변혁들을 고찰할 때에는 경제적 생활조건들에서의 물질적인, 자연과학적으로 정확히 확인할 수 있는 변혁과, 거기에서 인간이 이 충돌을 의식하게 되고 그것과 싸워 해결하는 바의 법률적, 정치적, 종교적, 예술적 혹은 철학적 형태들, 한 마디로 하자면 이데올로기적 형태들을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개인이 무엇인가를 그 개인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에 의해서 판단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변혁의 시기를 그 시기의 의식으로부터 판단할 수 없는 것이며, 오히려 이 의식을 물질적 생활의 모순으로부터, 사회적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에 현존하는 충돌로부터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MEW, Bd. 13, S. 9.)

사실 한국에서, 보다 정확하게는 구(舊) 조선에서 구래의 봉건적 생산관계, 봉건적 생산양식은 그것이 발전한 결과 이미 18세기 이후에, 특히 19세기 후반에 심각한 모순, 심각한 위기에 빠져들었다. 18세기 이후 특히 19세기 후반에 이미 사회혁명의 시기가 시작되었고, 경제적 기초와 함께 그 상부구조가 변혁되기 시작한 것이다. 18세기 이후의 급격한 사회변화, 특히 19세기 후반에 빈발한 농민반란들이 바로 그 표현이고 증거들이다.

물론 조선의 양반 지배계급은 그러한 변혁에 저항했고, 군을 동원하여, 그리고 심지어 외국군을 불러들여 그것을 억압했다. 그리하여 ‘동학’이라는 종교적 외피를 썼던 갑오농민전쟁의 패배야말로 구 조선이 자주적으로 봉건제를 해체하고 자본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을 좌절시키고 식민지로 전락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리고 일제에 의한, 토지조사사업을 통한 지주-소작관계라는 봉건적 생산관계로의 재편은 그 봉건제 내부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을 극한으로까지 발전시키게 되었고, 그 결과 이른바 ‘해방공간’에서, 그리고 이승만 정권 하에서 농지개혁이라는, 봉건적 생산관계, 봉건적 소유관계의 대대적인 해체작업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봉건적 생산관계, 소유관계의 철저한 해체야말로 한국 자본주의의 비약적 발전의 결정적이고 본질적인 조건이었다. 봉건제가 해체되면, 바로 그에 이어서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맑스도, 앞에서 인용한 바로 그 ‘서문’에 이렇게 쓰고 있지 않은가?

아주 개략적으로 보면, 아시아적, 고대적, 봉건적 그리고 근대 부르주아적 생산양식을 경제적 사회구성이 순차적으로 진보하는(progressiv) 시기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MEW, Bd. 13, S. 9.)

봉건적 토지소유의 혁명적 해체로 등장하는 농민적 토지소유, 농민적 분할지 소유, 즉 소농은 그 자체로서 독자적인 역사적 생산양식을 구성할 수 없는, 분해되고 해체될 수밖에 없는 생산형태이다. 소농은 그 자체가 이렇게 분해될 수밖에 없는, 즉 몰락하지 않을 수 없는 생산체제인데다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 의해 단행된 한국의 농지개혁이 창출한 그것은 그 분해, 즉 그 몰락을 가속화시킬 수밖에 없는 여러 요소, 여러 장치를 그 안에 가지고 있었다. 농지의 유상분배나 그 극도의 영세성, 그리고 전쟁비용을 농민에게 전가한 토지수득세, 엄청난 고율의 인플레이션, 미국의 잉여농산물 수입에 기초한 저곡가 정책 등등이 바로 그러한 요소, 장치들이었다.

바로 이러한 요소, 배경 때문에 농민경제는 농지개혁 직후부터 빠른 속도로 붕괴, 분해, 몰락하기 시작했고, 특히 박정희 정권 치하에서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에 걸쳐 대대적으로 몰락하게 되었다. 이 시대에 대대적으로 벌어진 이농과 탈농, 그에 따라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의 고지대에 거대하게 형성된 판자촌들, 이 모두가 바로 그러한 농민층 분해, 즉 소농 몰락의 표현들이었다.

소농의 이러한 대대적인, 급속한 몰락은, 한편에서는 소수 자본가계급에의 부의 급속하고 대대적인 집중을 강화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저임금 노동자를 대대적으로 창출했다. 그리하여 한국의 지본주의의 발전 속도는 바로 이 소농 몰락의 속도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농지개혁을 통한 봉건적 생산관계의 해체야말로 한국 자본주의의 비약적 발전의 본질적이고 결정적인 조건이었다는 것은, 한국 경제를, 1960년대까지도 한국 경제보다 월등이 앞서 있었던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 같은 남미 주요 국가들, 그리고 필리핀 등에서의 지지부진한 자본주의 발전과 비교해보면 명확해진다. 그들 국가의 공통적인 특징은 라티푼디움(latifundium)이라는 봉건적 대토지 소유의 온존, 혁명적인 농민적 토지소유의 부재(不在)이기 때문이다.

또한 장개석 치하의 중국과 대만을 비교하면 더욱 극적이다. 봉건적 토지소유를 온존시키고 거기에 매달렸던 본토 시절은 내전과 경제적 혼란, 저발전이,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처절한 패배가 그 특징이었다. 대만으로 쫓겨 간 장개석 일당은 농지개혁을, 즉 봉건적 토지소유의 해제를 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결과 대만 경제는, 대만의 자본주의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물론 소농의 급격하고 대대적인 분해, 즉 몰락을 수반하면서!


생산수단의 조달

한편, 자본주의적 생산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대량의 저임금 노동자라는 인적 생산요소뿐 아니라 발전한 물질적 생산수단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1960년대 후반 이후, 특히 1970년대 이후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에서는 이 또한 전혀 애로가 될 수 없었다. 우선 무엇보다도, 제2차 대전으로 파괴되었던, 주요 국가의 자본주의적 생산력이 이때는 이미 거대하게 복구되어 이른바 시장문제야말로, 즉 발전한 생산수단을 포함한 상품의 판로문제야말로 저들 자본주의적 생산자들이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로 등장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불’의 문제가 있다. 그런데 이 문제 역시, 한국의 정부와 자본가들이 풀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였을 뿐 아니라, 바로 지불받아야 할 자들, 즉 판로문제를 안고 있는 저들 생산수단의 생산자ㆍ판매자들이 풀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였다. 그리고 그 방법은 다름 아니라 원조와 차관을 공여하는 것이었다.

원조와 차관은, 한편에서는 한국 자본주의를 제국주의 열강 주도의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그 국제적 분업구조에 종속적으로 편입시키는 데에,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바로 그러한 과정을 통해 한국에 대한 제국주의적 정치적 지배를 강화하는 데에, 그리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바로 자신들의 시장을 확보하는 데에 이용되었다. 바로 이러한 목적과 필요 때문에 저들 제국주의는 한국 정부와 자본에 적극적으로 대량의 원조와 차관을 제공했고, 바로 그 때문에 한국 자본주의는 그 발전과 확대재생산에 필요한 물적인 생산요소로서의 발달한 생산설비와 원료를 조달할 수 있었다.

한국에의 원조 및 차관의 제공은 초기에는 미 정부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그리고 1970년대 이후에는 주로 미국 지배 하의 세계은행(IBRD)에 의해서,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민간 상업차관으로 이루어졌다. 나아가 박정희 정권 하에서 타결된 한일회담과 소위 ‘한일 국교 정상화’, 그리고 그 경제적 과정으로서의 소위 ‘청구권 자금’과 차관의 도입도, 마산 수출자유지역을 중심으로 한 직접투자도 물론 동일한 경제적 배경과 필요에 따른 것이었다. 그것들을 계기로 해서 박정희 정권과 야합한 한국의 소수 자본은 거대한 부와 이권을 배정받아 재벌로 성장해갔고, 일본의 자본들은 한국 경제의 재생산과정을 자신들에게 종속시키면서 지속적인 시장을 확보하고 확대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당연히 박정희나 그 패거리들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들이 아니었다.

발달한 자본주의적 생산에 시장문제, 즉 판로문제가 얼마나 본질적이고 결정적인 문제인가는 주기적으로, 그것도 갈수록 증폭된 형태로 발생하는 공황이 무엇보다도 웅변적으로 보여주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에 의한 대대적인 원조는 그것을 또 다른 형태로 흥미롭게 보여준다. 엄청난 규모로 퍼부은 유럽에 대한 저 유명한 마셜원조나 패전 일본에 대한 대대적인 원조가 대표적이다.

이들 원조는 물론 1930년대 이후의 대공황과 제국주의 전쟁, 그리고 쏘련의 대대적인 경제적 발전과 제2차 대전의 주요 전선이었던 대(對) 나찌 독일과의 전쟁에서의 승리에 자극받은 유럽과 일본 등지의 노동자계급의 사회주의 혁명 열기를 잠재워야 한다는 정치적 필요도 그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지만, 특히 경제적으로는 미국의 과잉생산을 타개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미 국민의 세금을 주요 재원(財源)으로 삼아 미국의 독점자본의 상품시장을 확보해준 것이었다. 한국에 대한 원조도, 한국에서의 전쟁도 물론 그러한 정치적ㆍ경제적 필요에 의해서 수행된 것이었고, 그 모두가 한국 자본주의의 급격하고도 비약적인 발전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한편, 해외로부터의 생산수단의 구입을 위한 재원의 상당 부분은 대대적인 노동력 수출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베트남 전쟁에의 파병이 사실상 외화벌이를 위한, 국가에 의한 용병 수출이었음은 이제 공공연한 사실로 되어 있다. 그리고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에 걸쳐 이루어진 독일에의 광부와 간호사 수출, 1970년대에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중동 건설붐, 즉 건설 노동자 수출, 이런 것들은 모두 외화벌이, 즉 달러벌이를 위한 노동력의 덤핑수출이었고, 그렇게 해서 벌이들인 달러는 중앙은행으로의 ‘외환 집중정책’을 통해서 권력과 야합한 특정 재벌들에게 분배되었다.

 수출되었던 노동자들은 사실상 거의 모두가 물론 아직도 심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특히 베트남 전쟁에 용병으로 수출되었던 사람들 중에서는 다수가 목숨을 잃었고, 불구자가 되었으며, 미군이 살포한 고엽제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불행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를 대부분이 이해하지조차 못하고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과 그 모순, 빈곤화

그런데 자본주의가 발전한다는 것은, 한편에서는 사회적 노동생산력이 급격히 고도로 발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자본주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 수십 년 사이에 발전한 생산력이 그 이전 수천 년 동안에 발전한 그것을 훨씬 압도한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앞에서 인용했던 맑스의 언명을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불과 몇 쪽 앞에서의 인용의 중복이지만, 그 언명은 그러한 중복을 무릅쓰고 여기에서 다시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은 그 발전의 어떤 단계에서 그것이 그때까지 그 내부에서 운동해온 기존의 생산관계와, 혹은 그 생산관계의 법률적 표현에 불과한 것인 소유관계와 모순에 빠지게 된다. 이들 관계들은 생산력의 발전형태들로부터 그 질곡으로 일변한다. 그때에 사회혁명의 시기가 시작된다. 경제적 기초의 변화와 함께 거대한 상부구조 전체가 혹은 서서히, 혹은 급격하게 변혁된다.

다름 아니라, 오늘날 다시 엄습한 대공황이야말로,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발전한 그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이 지금까지 “그 내부에서 운동해온 기존의 생산관계와, 혹은 그 생산관계의 법률적 표현에 불과한 것인 소유관계와”, 즉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혹은 “그 생산관계의 법률적 표현에 불과한” 자본주의적 소유관계와 거대한 모순에 빠졌다는 사실을, 그리하여 이들 자본주의적 “관계들은 생산력의 발전형태들로부터 그 질곡으로 일변”했으며, “사회혁명의 시기가 시작”되었음을 웅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발전은, 저들 ‘근대화론자들’이 ‘근대화’라는 표현으로 은폐하고 미화하는 것과는 반대로 노동자계급을 위시한 광범한 근로인민의 빈곤화, 고통, 타락, 노예화를 수반한다. 그 발전은 소농의 광범한 몰락과 무산자화를 수반ㆍ전제하고 있고, 노동자들은 갈수록 더 많은 시간의 잉여노동, 즉 부지불(不支拂)노동을 강요당하고, 즉 더 많이 착취당하고, 갈수록 더 많은 실업과 불완전고용에 시달리게 된다. 오늘날 이 사회의, 아니 자본주의 전 세계에 만연한 빈곤, 실업, 비정규직화를 보라.

이것이 바로 저들 ‘근대화론자들’, 박정희 찬양자들이 ‘박정희가 근대화 혁명을 수행하고, 대한민국의 경제기적을 이끌어냈기 때문에 우리가 잘 살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노동자계급을 위시한 광범한 근로인민의 빈곤, 고통, 타락, 노예화들 덕분에 그들이 잘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광범한 대중의 빈곤화 고통, 타락, 노예화 위에 쌓아가고 있는 저들의 거대한 부는 물론 저들이 파는 자신들의 무덤이다. 억압과 착취는 저항을, 혁명을 낳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북아프리카 지역이나 중동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동자ㆍ민중의 대대적인 투쟁은 물론이려니와 특히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 프랑스 등지에서 대대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노동자들의 투쟁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덧붙여서 간단히만 언급하자면,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 그 생산력의 발전이 이미 얼마나 그 생산관계와 양립할 수 없는 단계에 도달했던가를 보기 위해서는 우리는 1930년대 대공황과 그 귀결을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본주의는 그 통상의 운동법칙 속에서 그 공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대략 잡아도 5,000만 명 이상의 인간을 살육하고, 주요한 생산기지들을 초토화시켰던 인류사 최대의 비극, 제2차 대전을 통해서만 자본주의적 생산을 존속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4. 한국 자본주의 발전사 속에서의 5ㆍ16 군사 쿠데타와 박정희 일당의 역할

한국 자본주의의 급격한, 비약적인 발전은, 박정희와 그 패거리의 어떤 탁월한 정책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선제당한 농민혁명으로서의 농지개혁을 통한 봉건적 토지소유의 해체가 그 가장 본질적이고 결정적인 조건ㆍ계기를 형성했고, 거기에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시장문제가 겹치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면, 한국 자본주의의 이러한 비약적 발전과정에서 박정희와 그 패거리가 논 역할은 무엇인가? 이 문제는 사실은 한국 현대사의 진실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한국 현대사의 진실은 현재의 정치적ㆍ법률적 조건 속에서는 일종의 ‘천기(天機)’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어떤 피의 보복을 감수하지 않고는 그것을 공개적으로 누설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헌법에는 여러 ‘자유’ 조항들이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지만, 그 상위법인 국가보안법이 따악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가피 자유인의 언어가 아니라 노예의 언어로, 제한적으로 논할 수밖에 없는데,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5ㆍ16 군사 쿠데타와 박정희 일당의 지배는 4월 혁명의 압살이었고, 민중적ㆍ인민적 사회발전, 그 정치ㆍ경제ㆍ문화 발전의 철저한 압살이었다. 박정희와 그 패거리가 한국 경제의 발전,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서 논 역할은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부르주아적ㆍ소부르주아적 논객들은 4월 혁명의 핵심적 원인과 성과가 마치 3ㆍ15 부정선거를 감행한 이승만의 ‘장기집권’ 기도와 그 저지인 것처럼, 그리하여 협소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문제였던 것처럼 얘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표면현상이었을 뿐이다. 4월 혁명의 본질은 사실은 거대한 계급투쟁이었고, 미 군정기와 이승만 정권의 집권기, 그리고 특히 50년대 초의 전쟁을 거치면서 처절하게 패배하고 괴멸되다시피 했던 노동자ㆍ민중의 대반격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렇게 노동자ㆍ민중의 대반격이었다는 사실은 혁명 후 1년여 사이에 전개된 정세 자체, 민중의 역동적ㆍ혁명적 진출 자체가 웅변하고 있었다.

그런데 약체(弱體) 장면 정권은 민중의 이러한 역동적ㆍ혁명적 진출을 통제하고 억압할 능력이 없었다. 부르주아 체제 자체에, 예속적 부르주아지 지배체제 자체에 위기가 임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체제를 온존ㆍ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무자비한 폭력, 무자비한 억압이 필요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아니 동원된 것이 박정희ㆍ김종필 일당의 군사 쿠데타였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와이어(wire)를 당기는 것은 미국, 정확하게는 미국의 독점자본이고, 국무성이나 CIA 같은 기구이다.

이제 노동자ㆍ농민을 비롯한 근로대중은 철저한 무권리 상태를 강요당했다. 농민층 분해, 소농의 몰락은 더욱 가속화되었고, 노동자와 도시빈민은 어떤 자주적인 집회ㆍ결사의 자유도 박탈당해 더욱더 저임금과 실업 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그럴수록 착취는 강화되었고, 그만큼 자본주의 발전, 자본의 독점은 강화되어갔다. 이것이 박정희와 그 패거리가 한국의 자본주의 발전에 기여한 것이라면 기여한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그 결과는 당연히, ‘우리가 잘 살게 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잘 살게 되었다’고, ‘단군 이래 우리가 가장 잘 살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저들만이 잘 살게 되었다.

오늘날 이 사회에 만연한 실업, 비정규직, 빈곤, 수많은 노동자들의 산재ㆍ산재사망, 자살, 투쟁이 바로 그 생생한 증거이다.

혹시 이렇게 반론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 지금부터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거부(巨富)가 아니면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던 예컨대 자가용 승용차를 이제는 많은 노동자들도 가지고 있지 않느냐고. 그런데 왜 그들이 빈곤하다고 하느냐고.

그러나 그렇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빈곤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을 드러낼 뿐이다. 지금부터 불과 1백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어떤 거부, 어떤 왕후장상도 자가용 승용차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니 가지고 있을 수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가난하지 않았고, 거부(巨富)요 거부의 왕후장상이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수많은 노동자들이 자가용 승용차를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그들이 부자인 것이 전혀 아니다. 그들 대부분은 사실상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고, 그들 중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러한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다 못해 절도 등의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고, 일가족 집단자살을 하기도 한다. 생존에 필수적인 물질적인 생활수단은 그 종류도, 그 필요 범위도 사회적ㆍ역사적으로 규정되는 것이어서 오늘날 자가용의 승용차는 사실상 대부분의 노동자 가족에게 필수적인 생활수단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사에서 박정희나 그 패거리가 어떤 역할을 했든, 자본주의의 발전 그 자체는 필연적인 것이고, 진보적인 것이다.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은 그 발전의 어떤 단계에서 그것이 그때까지 그 내부에서 운동해온 기존의 생산관계와, 혹은 그 생산관계의 법률적 표현에 불과한 것인 소유관계와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이고, 바로 “그때에 사회혁명의 시기가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권 이래의 야만적인 사상과 학문의 자유에 대한 억압 때문에 불모의 상태에 있던 사회과학이 1980년대의 대대적인 민중운동의 재생과 함께 다시 복원되기 시작했을 때 많은 논자들은 한국 사회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인정하는 데 인색했고, 바로 그 ‘저발전’ 속에서 한국 사회 변혁의 가능성과 근거를 찾고자 했다. 일부의 담론에서는 아직까지도 그 여운을 드리우고 있는 이른바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이나 ‘식민지 반(半)자본주의 사회론’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발전’이라는 단어 속에 ‘긍정적’ 혹은 ‘좋은 것’ 같은 주관적 평가를 부여한 비과학적인 사고이다. 사회의 발전이란 어떤 사회에 내재한 요소와 가능성, 그 모순이 전개되고 성숙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사회는 그것이 발전함으로써 그 발전이 일정한 단계에 달하여 변혁되는 것이다.

저들 박정희 찬양자들이 떠드는 한국 경제의 기적, 즉 한국 자본주의의 비약적인 발전은 사실은 바로 그 임종의 시기가 가까워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 임박한 자본주의의 임종을 보다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최근 수십 년 동안 비약적으로 전개되어온 과학기술혁명의 성격과 그 자본주의적 이용이 노동자계급에게 미치는 영향, 그리고 그 비약적 전개의 역사적 의의 등을 고찰해야 하지만, 시간[=지면] 관계상 여기에서는 생략할 수밖에 없다.) <노사과연>

[4월혁명 51주년 기념 강연 원고] 프로파간다로서의 ‘박정희 근대화론’*1)

채만수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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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글은 원래 사월혁명회가 주최한 ‘4월혁명 51주년 행사’(2011. 4. 18., 흥사단 강단)에서의 “‘박정희 근대화론’은 허구”라는 제목 하의 ‘특별강연’을 위해 작성한 것으로서, 실제의 강연과 질의ㆍ응답을 통한 발언에 기초하여 부분적으로 보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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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10:11 2011/05/11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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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투쟁 가운데 [그 성격을: 역자] 가장 해명하기 어려운 것은 리비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것이다.

그 자체 리비아 북부의 가장 풍부한 유전지대이자 리비아의 대부분의 석유와 가스 파이프라인, 정유소들, 천연가스(LNG) 수출항과 인접한 벵가지(Benghazi)에서 반란이 시작된 것은 단지 우연일까?

그 지역 전체 인민에게 심각하기 이를 데 없는 위험을 야기할 제국주의의 군사개입의 가능성은 어떤가?

리비아는 이집트와 다르다. 그 지도자 모아마르 알 가다피(Moammar al-Gadhafi)는 [이집트의: 역자] 호스니 무바라크(Hosni Mubarak)와 같은 제국주의의 괴뢰가 아니다. 여러 해 동안 가다피는 제국주의와 투쟁하는 국가들 및 운동들과 동맹을 맺어왔다. 1969년에 군사 쿠데타를 통해서 [제2차 대전에서 구(舊) 식민지 종주국 이탈리아가 패배하여 물러난 후 새로운 점령자 미국과 영국이 세운 괴뢰 왕정 이드리스 1세(Idris I)를 타도하고: 역자] 권력을 잡자 그는 리비아의 석유자원을 국유화했고, 그 자금의 많은 부분을 리비아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에 사용했다. 인민의 생활조건들이 극적으로 개선되었다.

그 때문에 제국주의자들은 리비아를 괴롭히기로 작정했다. 미국은 실제로 1986년에 [수도: 역자] 트리폴리(Tripoli)와 벵가지에 공습을 가하여, 가다피의 어린 딸을 포함하여 60명을 죽였다 ― 부르주아 언론은 좀처럼 이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리비아 경제를 망가뜨리기 위해서 미국과 유엔은 혹독한 제재를 가했다.

2003년에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하여, 펜타곤이 승리에 도취하여 “충격과 공포”(shock and awe)라고 부른 폭격전으로 바그다드를 크게 파괴해버린 후에, 가다피는 제국주의자들에게 커다란 정치적ㆍ경제적 이권을 제공함으로써 위협받고 있던 리비아 침략을 피하고자 했다. 그는 외국 은행들과 기업들에 경제를 개방했다. 그는 IMF의 ‘구조조정’ 요구에 동의하여, 많은 국유기업들을 사유화하고, 식품이나 연료 같은 생활필수품에 대한 국가보조금을 삭감했다.

리비아의 인민 역시, 세계적인 자본주의 경제위기가 유발하고 있고, 다른 국가에서의 반란의 밑바탕에 있는 고물가와 고율 실업에 똑같이 시달리고 있다.

아랍 세계를 휩쓸고 있는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정의를 위한 투쟁이 리비아에서도 역시 공감을 얻고 있다는 사실엔 의문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가다피 정권에 대한 불만이 주민의 커다란 부분을 자극하고 있다는 데엔 의문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서부 지역에서 반대파의 지도자로 나서고 있는 자들의 다수는 오래전부터 제국주의의 공작원들이었던 사람들임을 아는 것이 진보적인 사람들에게는 중요하다. [영국의: 역자] BBC 방송은 2월 22일에 리비아 공화국의 녹색기를 끌어내리고 거기에 타도된 이드리스 왕의 깃발을 올리는 벵가지의 군중 시위 장면을 보여주었는데, ― 이드리스 왕은 미국과 영국 제국주의의 괴뢰였다.

서방 언론 보도의 많은 부분은 망명가 단체 ‘리비아 구제를 위한 민족전선(National Front for the Salvation of Libya)’가 제공하는 ‘추정된 사실들’[실제로는 기껏해야 ‘소문’: 역자]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 단체는 미국의 CIA가 훈련시키고 자금을 대주고 있다. 인터넷 검색 싸이트 Google에서 이 단체의 이름과 CIA를 함께 검색해보라. 그러면 수백 개의 관련 사항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독점자본의 대변지인: 역자] 월스트리트저널(Wall Street Journal)은 2월 23일자 사설에서, “미국과 유럽은 리비아인들이 가다피 정권을 타도하는 것을 도와야 한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역자] 경제계에도 워싱턴의 정가에도 쿠웨이트나 사우디아라비아, 바레인의 인민이 그들의 독재적 지배자들을 타도하는 것을 돕기 위해 개입해야 한다는 얘기는 한 마디도 없다. 현재 그 지역을 뒤흔들고 있는 대중투쟁들에 대해서 온갖 입에 발린 말들을 해대고 있지만, 그것[쿠웨이트나 사우디, 바레인의 친미 독재자들 타도 지원: 역자]은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집트나 튀니지아와 관련해서는, 제국주의는 대중들이 길거리로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 가능한 온갖 공작을 다 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봉쇄와 폭격, 침략으로 가자(Gaza) 지역에서 수천 명의 팔레스타인 인민들이 죽을 때에도 미국이 그 팔레스타인 인민들을 돕기 위해 개입해야 한다는 얘기는 한 마디도 없었다. 그 정반대였다. 미국은 시온주의자들의 정착촌 건설에 대한 비난을 막기 위해서 개입했다.

리비아에 대한 제국주의의 이해관계는 쉽게 알 수 있다. 리비아는 아프리카에서 세 번째로 큰 석유 생산국이지만, 가장 많은 확인된 매장량―443억 배럴의 매장량을 가지고 있다고, 2월 22일에 블럼버그 통신(Bloomburg.com)은 쓰고 있다. 상대적으로 적은 인구를 가지고 있지만, 거대 석유회사들에게 거대한 이윤을 가져다 줄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국가인 것이다. 제국주의는 바로 그런 눈으로 리비아를 바라보고 있고, 바로 그래서 리비아에서의 인민의 민주적 권리에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제국주의 석유 왕들은 가다피로부터 이권을 얻어내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완전히 소유하고 쥐고 흔들고 좌지우지할 수 있는 정부를 원하고 있다. 그들은 가다피가 왕정을 타도하고 석유를 국유화한 것을 한 번도 용서하지 않았다.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는 그의 칼럼 “감상(感想)”에서 석유에 대한 제국주의의 갈망을 지적하면서, 미국이 리비아에 군사적으로 개입할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일부 세력이 미국의 그러한 개입을 촉구하는 거리 시위를 벌이려고 획책하고 있다. 우리는 이에 즉각 반대해야 하며, 선의의 사람들에게 미국의 이라크 개입으로 죽거나 난민이 된 수백만을 상기시켜야 한다.

진보적인 사람들은 자신들이 리비아의 대중운동이라고 보는 것에 호감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그러한 운동을 도울 수 있는 것은, 어떤 형태의 것이든 제국주의의 개입을 거부하고, 그들 대중의 요구를 지지하는 것이다. 리비아 인민의 장래를 결정해야 하는 것은 리비아 인민 자신이다. <노사과연>


[역자주: 이 글은 미국의 ‘노동자세상당’(Workers World Party)이 발행하는 신문 Workers World의 사설(Editorial) “Libya and imperialism”(http://www.workers.org/2011/editorials/libya_0303/)을 번역한 것이다. 인터넷엔 2011년 2월 23일자로 게재되었다.]


번역: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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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1 15:41 2011/03/21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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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토의 불가피한 전쟁 (2011년 3월 2일)

이집트와 튀니지와는 달리, 리비아는 아프리카 국가 중에서 인간 개발 지수(Human Development Index)가 가장 높고 수명도 가장 길다. 또한 리비아 정부는 교육과 보건에 특별한 신경을 쓰고 있으며, 문화 수준도 단연코 이웃 국가들보다 높다고 하겠다. 리비아의 문제는 다른 데 있다. 리비아 민중은 식량이나 기본적인 복지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리비아의 야심찬 생산 시설 건설과 개발 프로젝트 때문에 많은 노동자들을 수입해야 했던 것이 문제다.

이집트, 튀니지, 중국, 여타 나라에서 수백, 수천의 노동자들이 리비아로 들어 왔다. 리비아는 막대한 소득이 있었고, 다른 부유한 국가의 은행에 넣어둔 빵빵한 현금고를 가지고, 그 부유한 국가들로부터 소비 상품부터 고도화 병기에 이르기까지 갖가지를 수입했다. 결국 바로 그 수출국들이 지금은 인권의 이름으로 리비아를 침공할 준비를 하고 있지만.

대중 매체들이 뿌려대는 거대한 허위의 캠패인은 세계 여론을 혼란에 빠뜨렸다. 리비아의 진실이 밝혀지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할 것이나 결국 진실은 이미 널리 퍼진 거짓에서부터 분리될 것이다.

텔레수르(TeleSUR)1) 같은 진지하고 명망있는 방송국들은 고맙게도 리비아의 진실을 보도하기 위해 리비아의 여야 양쪽에 보도팀과 촬영팀을 특파했다.

본국과 연락이 끊어진 상태에서도 성실한 외교관들은 살해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인근 지역을 돌아다니며 목숨을 내놓은 채 밤낮으로 경과 보고를 위해 상황을 관찰했다. 하지만 제국과 그 동맹들은 거짓 정보를 퍼뜨리고 진실을 교란하기 위해 교묘한 언론 술책을 썼다.

의심의 여지없이 벵가지 반군의 젊은이라면, 남자고 여자고, 베일을 썼건 안 썼건,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비록 인구 95%가 이슬람교도이긴 하지만, 리비아는 아랍 국가로, 그 부족 구성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부유한 선진국의 소비 경제를 떠받치는 방대한 석유 생산량을 감당하고 있는 아랍 세계에 혁명의 물결이 퍼지는 것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제국주의와 나토는 리비아의 내전을 명분삼아 군사 개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이번 사태 초기부터 발표된 미국의 입장은 분명히 이러한 맥락에서 봐야 한다.

환경(미국 정치 환경―역자)이 더 유리해질 일은 거의 없다. 공화당 우파는 말솜씨(레토릭) 좋은 오바마 대통령에게 지난 11월 선거 때 큰 타격을 입혔다.

극단주의 티파티의 이념적 지지를 받는 파시스트 "임무 수행" 그룹은 대통령의 선택지 대부분을 지워 버렸고, 사상 최악을 기록하고 있는 재정 적자과 통제를 벗어난 공공 부문 부채 상승으로 인해 오바마의 건강 보험 프로그램과 불안한 경제 회복 계획이 위험에 처하게 됐다.

미국은 스스로 만들어 낸 거짓과 혼란의 급류를 타고 UN인권위원회 내에서는 목표한 바를 모두 이루었지만, 리비아 군사 개입을 위한 안보리 안건에서 중국과 러시아의 찬성을 얻어내지 못하고 있다. 허나 군사 개입에 대해서 힐러리 국무장관은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 하겠다고 한치의 의심도 남기지 않는 어조로 웅변했다.

예상한 대로 리비아가 내전에 휘말리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미국이 이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 취할 수 있었던 조치도 아마 국방장관더러 불난 집에 기름 한통 끼얹으라고 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것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희대의 연기자들도 절대 상상치 못한 문제가 있었다. 바로 반군의 지도자들이 몹시 복잡한 상황에서 어떠한 외세의 군사 개입도 거부한다고 선언하면서 봉기했다는 사실이다.

리비아 국민 의회 대변인 압델 아피스 고가는 2월 28일 트리폴리에서 동쪽으로 1000km 떨어진 도시에서 다양한 매체의 기자들을 만나 "리비아 나머지 지역도 리비아 인민에 의해서 해방될 것이다." 고 발표하였다.

고가는 반군 점령 도시들을 대표하는 "국민 의회"의 진영을 발표하면서 "트리폴리 해방을 위해서 무력도 필요할 것이다." 라고 확신했다.

또한 고가는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정보이지만, 그 때문에 우리의 영토, 영해, 영공이 침해받는 걸 원하진 않는다." 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AFP 통신은 그날 늦게 이렇게 논평했다. "자주 통치에 대한 반군 지도자들의 비타협적인 태도는 동시에 벵가지의 리비아 인민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벵가지의 각국 기자들에게 이러한 의견들이 전해졌습니다."

같은 날 벵가지 대학교의 정치학 교수인 알베이르 임네이나는 "리비아에는 아주 강력한 민족주의적 감정이 흐르고 있습니다." 라고 진술했다.

그녀는 2003년 미국이 민주주의 도입이라는 미명 하에서 이라크 지역 전체를 단계적으로 침략했지만, 그 가설은 진실 앞에서 무너져 버리고 말았던 사실을 인용하며 이렇게 강조했다. "게다가 이라크의 전례가 아랍계의 모든 사람들을 질리게 했지요."

"불안의 극심한 고통 속에 이라크에서 일어난 일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수순을 따르는 것은 전혀 매력적이지 않아요. 미국인들이 들어와서 결국엔 카다피를 그리워하게 될까봐 걱정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혁명이고 앞으로 뻗어 나가는 것도 우리에게 달린 일이죠."

이 방송이 나간 지 몇시간 되지 않아 미국의 두 주요 일간지 [뉴욕타임즈]와 [워싱턴포스트]는 황급히 이 주제에 대한 새로운 기사를 찍어냈고, 독일의 DPA도 다음날 3월 1일 다음과 같이 받아썼다. "오늘자 미국발 소식에 따르면, 리비아 야당은 카다피에게 충성을 다하는 군대에 대해 서방 국가들이 전략적 지점에서 공습을 가해주었으면 하고 요청할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리비아 국민 의회 내에서도 토론이 있었다고 [뉴욕타임즈]와 [워싱턴포스트]가 인터넷 버전을 통해 보도했다.

[뉴욕타임즈]에 따르면 이러한 토론은 곧 카다피 재집권 가능성에 대한 반군 지도자들 점증하는 절망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UN의 틀 안에서 공습이 이루어질 경우, 이것은 국제 개입을 뜻하지 않는다." 라고 [뉴욕타임즈]는 리비아 국민 의회 대변인을 인용했다.

"국민 의회는 변호사, 학자, 판사, 리비아 사회의 주요 인사들로 이루어져 있다."

DPA 통신은 이렇게 전한다.

"[워싱턴포스트]는 서방의 지원 없이 카다피 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면 오래 버틸 수 없으며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할 것임을 깨달은 반군 지도자들을 인용했습니다."

DPA가 공업, 농업, 건설 노동자들, 실물 생산에 연결된 이들, 젊은 학생들과 시위대 안에서 발견되는 전투원들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은 점은 충격적이다.

어째서 반군을 '미국과 나토의 공습을 이끌어 내 리비아인들을 죽이길 원하는 사회 주요 인사들로 이루어진 집단'으로 몰고 가려 하는가?

언젠가 진실은 알려질 것이다. 이라크에서 사람들이 죽고, 고향땅이 무너지며, 수백만의 사람들이 길거리로 내몰리거나 이민을 가야만 했던 끔찍한 경험을 유창하게 서술해주는 벵가지 대학교의 정치학 교수 같은 사람들이 있는 한!

3월 2일 EFE 통신은 고가를 다시 섭외했다. EFE의 방송에서 고가의 발언은, 내가 보기에는, 전날의 발언을 긍정하면서도 부정하는 듯 한 인상이었다. “3월 2일, 벵가지의 리비아 반군 지도자들은 오늘 UN 안보리에 카다피 정권의 ‘용병에 대하여’ 공습을 요청했다.”

“우리 군은 수비적 입장에 서 있으므로 용병에게 공격을 가할 수 없다.” 벵가지에서의 기자회견에서 고가는 이렇게 말했다.

“전략적 공습은 우리가 거부하는 국제 개입과는 다른 것이다.” 이 대변인은 이렇게 강조했다. 여전히 리비아 사태에 대한 외세의 군사 개입을 반대하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숱한 제국주의 전쟁 중에 이와 유사한 게 있을까?

1936년 스페인 내전? 1935년 무쏠리니의 에티오피아 침공? 2003년 조지 부시의 이라크 전쟁? 아니면 1846년의 멕시코에서부터 1982년 포클랜드에까지 미국이 주도한 수십번의 아메리카 침공 전쟁 중에서?

아! 물론, 우리 쿠바에 대한 피그스만 침공과 이에 이어진 50년 간의 경제봉쇄도 빠뜨려서는 안되겠다. 오는 4월 16일은 피그스만 침공에 희생된 이들을 기리는 날이다.

베트남 전쟁까지 포함해서, 이 모든 전쟁 중에서 수백만이 목숨을 잃고 숱한 정당화 수단을 소모하고 가장 냉소적인 방법이 군림했던 전쟁은 과연 어느 것인가?

리비아에서 일어날 피할 수 없는 군사 개입에 대해서 의문을 품고 있는 이들을 위해서, 내 생각에 취재가 아주 잘 된 것으로 보이는 AP 통신의 오늘자 방송을 소개하겠다. "일부 나토 국가들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1990년대 발칸반도에서 비행 금지 구역을 설정했던 것을 모델 삼아 리비아에도 비행 금지령을 내리는 계획을 고려하고 있다고 외교 정보원은 말했습니다"

결론은 이렇게 난다. "민감한 정세를 고려하여 익명 처리를 요청한 이 외교 정보원은, 현재 고려 중인 선택지는 서구 군사 동맹이 1993년 UN의 위임을 받아 보스니아 영공에 설정한 비행 금지 구역이나, 1999년 UN과는 무관하게 나토가 실행한 코소보 공습 정도를 모델로 삼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해서 쓰겠다.


나토의 불가피한 전쟁 2편(2011년 3월 3일)

리비아 대령이던 28살 카다피는, 이웃 이집트의 압델 나세르의 영향을 받아, 1969년 국왕 이드리스 1세를 내치고 중요한 혁명적 개혁을 이루었다. 농지 개혁, 석유의 국유화 등이 그것이다. 늘어나는 소득은 경제 사회적 개발에 재투자됐고, 특히 교육과 보건 서비스가 드넓은 사막 위에 좁디 좁은 경작지를 가지고 사는 소수의 리비아 인민들을 위해 중요하게 취급됐다.

"화석수(아주 오래된 지하수―편집자2))"라는 넓고 깊은 바다가 그 사막 아래에 있었다. 경작지 실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미래엔 그런 대수층3)이 석유보다 더 중요할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부분적으로는 이슬람 국가를 특색짓는 열정적인 종교적 신념이 아랍 국가에 잔존하는 강력한 부족적 요소들을 대신하였을 것이다.

리비아 혁명은 합법적이고 정치적인 조직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창안하고 도입했으며, 쿠바도 기본적으로 그것들을 존중하였다.

우리는 리비아 지도력이라는 개념에 관한 어떠한 논평도 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과 나토의 기본적인 걱정거리는 리비아가 아니라 아랍계에 퍼지고 있는 혁명의 물결임은 분명하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이것을 저지하려 들 것이다.

요근래, 이집트와 튀니지에서 봉기가 일어나기 전까진, 미국과 나토 연합국들의 관계가 몹시 좋았던 사실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으리라.

리비아와 나토 사이의 고위급 회담에서 나토 측의 누구도 카다피와 어떠한 트러블도 없었다. 리비아는 고품질 석유와 가스, 포타슘의 안정된 공급처였으니까. 20세기 초에 리비아와 유럽 열강들 사이에 있었던 일4)로 인한 껄끄러움들은 모두 극복되었다.

석유 시추와 송유 같은 전략적 부문들에서 리비아는 외국의 투자를 받았다.

많은 공기업에 대한 민영화가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IMF는 기꺼이 한 역할을 차지했다.

카다피를 칭찬한 아즈나르(역: 1996~2004의 스페인 수상)의 행동은 논리적으로 볼 때 진실성이 없어 보였고, 아즈나르의 뒤를 이어 블레어(영국의 전 수상―역자), 베를루스코니(이탈리아의 총리―역자), 사르코지(프랑스의 대통령―역자), 사파테로(스페인의 전 수상―역자)는 물론 내 친구인 스페인 국왕까지 과거에 카다피를 냉소했다. 그들은 즐거워했다. 

내가 하는 소리가 단지 '이건 좀 아닌데...' 정도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왜 저들이 카다피를 헤이그의 국제 사법 재판소의 법정에 세우려고 하는지 나 스스로에게 한번 질문해 보고 있는 것이다.

저들은 저항 중인 비무장 상태의 민간인에게 종일 사격을 가한 것을 들어 카다피를 고발하려고 한다. 하지만 리비아 정부가 가지고 있던 고성능의 진압장비와 무기들이 사실은 미국, 영국을 비롯해 카다피의 저명한 친구들이 제공해준 사실은 왜 해명하지 않는가?

나는 현재 리비아 침략과 점령을 정당화하기 위해 쓰이고 있는 냉소와 거짓말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바이다.

내가 카다피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2001년 5월이다. 그가 살고 있던 집을 레이건이 습격한지 15년 째 되던 해이다. 그는 그 집이 있던 자리로 나를 데려가 그 흔적을 보여 주었다. 당시 그의 집은 폭격기로부터 직접 포격을 당해 대부분 파괴되어 있었고, 당시 공격을 받아 그의 세살박이 딸이 목숨을 잃었다. 로널드 레이건이 살해한 것이다! 나토나 UN인권위나 안보리와의 일체의 협약도 없이!

그 전에 리비아를 갔던 때가 1977년이었는데, 그때는 그 땅에 혁명 과업이 진행된지 8년째 되던 해였다. 트리폴리를 갔었고, 세브하의 일반 인민 의회에도 참가했고, 화석수를 끌어 올려 관개로 사용하는 농업 실험도 구경했다. 벵가지에 갔을 때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2차 세계대전의 역사적 전투를 겪은 전설적인 나라였다. 당시 전체 인구가 600만이 채 안 되었고, 그 막대한 화석수나 석유의 매장량도 알려지기 전이었다.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식민 지배에서는 모두 해방된 상태였다.

우리는 앙골라에서 미국과 콩고, 남아공 정부가 부족 노선을 이용해 조직한 용병 군단과 15년간 싸웠다. 1975년 미국의 지시를 따르는 이 용병 군단은 앙골라를 침략해 앙골라 계급 해방을 저지하고 기동화기를 이끌고 르완다 접경지대까지 도달했다. 이 침략 과정에서 상당한 쿠바 교관들이 사망했고, 우리는 신속히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5).

쿠바 세계주의자들과 앙골라 부대가 협력하여 싸움으로써 남아공 군은 당시 남아공이 점령중이던 나미비아 땅까지 밀려나지만, 이어 앙골라 혁명 과업을 저지하라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도움으로 남아공은 핵을 개발하게 된다. 하여 쿠바와 앙골라 연합군이 1988년 쿠이토 쿠아나발레 전투에서 남아공 공군력을 대패시키고 위험을 무릅쓰고 남아공 군이 저항을 시도하던 나미비아 국경으로 진군했을 당시, 남아공은 이미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1962년 앙골라 남부에서 쿠바군이 핵공격의 위험에 노출된 이후, 두번째 핵 위협이었다. 하지만 이미 핵무기 사용으로도 전세를 뒤집을 수 없다는 것을, 혐오스러운 체제에 종말을 고할 패배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일들이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과 남아공의 피에트 보사가 저지른 만행이다.6)

오늘날 리비아 내전을 목도에 두고, 과거 아프리카의 내전에 제국주의가 개입하여 벌어진 끔찍한 이야기와 그 전쟁이 앗아간 수백 수천의 목숨들에 대한 이야기를 어디 들을 수나 있는가?

아랍 인민들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위험 앞에서 이런 과거를 떠올리고 싶지 않다. 그들은 억압과 착취의 희생자가 되기로 체념한 것이 아니잖은가.

아랍 세계의 혁명 세력은 미국과 나토의 위력 앞에 겁을 먹고 있다. 이는 모든 특권을 지닌 자를 앞에 둔, 모든 권리를 읽은 자의 심정이리라. 따라서 이 혁명은 1789는 바스티유를 폭풍에 몰아 넣었던 유럽에서의 운동보다 훨씬 엄청난 운명을 겪게 될 것이다.

스스로 '짐이 곧 국가'라 거리낌없이 떠벌이던 루이 14세가 누리던 특권마저도 사우디 아라비아의 압둘라 빈 압둘 아지즈 왕이 누리는 특권에는 미치지 못하고, 루이 14세의 부라고 해봐야 거의 모든 땅이 사막인 사우디 아라비아의 지하를 흐르는 막대한 부(석유―석유)에는 턱도 없다. 이 막대한 부는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이 시추량을 결정하고 국제 유가를 조절하는데 이용된다.

리비아 위기가 시작되고 나서 사우디 아라비아의 석유 생산은 하루 100만 배럴에 육박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 사우디 아라비아와 석유 회사들의 일일 수익은, 최저가로 계산하더라도, 10억불 이상 증가했을 것이다.

사우디의 인민들이 돈 속에서 헤엄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없다. 건설이나 다른 부문에서 쥐꼬리 만한 임금을 받으며 하루 13~14시간씩 일하는 노동자들의 생활 조건에 대한 슬픈 이야기들만이 있을 따름이다.

이집트와 튀니지의 노동자들과, 요르단과 팔레스타인 점령지와 예멘뿐만 아니라 일인당 소득이 훨씬 높은 바레인과 아랍 에미리트에서까지 실업청년들에 의해 일어난 일들을 보고, 착취의 일반 체계를 뒤흔드는 혁명의 물결에, 사우디 지배층은 깜짝 놀라 충격을 받았다.

예전과는 달리 정보 왜곡이 유난한 아랍에서도 오늘날에는 인민들이 여러 사건에 대해 즉각적으로 정보를 얻고 있다.

현재 이어지고 있는 사건이, 식량 가격의 현저한 상승과 기후 변화에 의한 절망적인 영향과, 동시에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은 현상 유지를 원하는 특권층들에게는 최악으로 느껴질 것이다. 반면에 세계 최대의 옥수수 생산국인 미국은 옥수수 생산량의 40%와 콩 생산량의 대부분을 자동차에게 먹일 바이오연료 개발을 위해서 허비하고 있다. 세계 농업 생산에 관한 정보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미국의 생태학자 레스터 브라운은 현 식량사태에 대한 한가지 아이디어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볼리비아의 대통령 휴고 차베즈 역시 나토의 개입없이 리비아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분주하게 노력하고 있다. 만약 실제 개입이 이루어지기 전에 차베즈가 광범위한 여론을 형성하는 개가를 올린다면 그가 최종 목표를 달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이라크에서 겪었던 끔찍한 경험을 또다른 나라에서 다시 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고찰 끝. <노사과연>

번역 : 임경민(회원)


[역자주: 

출저: http://www.granma.cu/ingles/reflections-i/3marzo-nato.html

원출저: CubaDebate

영역: Granma International

한역: 임경민(walkleftiii@gmail.com), 영역에서 중역]

--------------------------------------------------------------------------------

1) 역자 주: TeleSUR는 베네수엘라에 기반을 둔 범남미 진보매체 방송국. 자세한 설명은 위키 항목 참고: http://en.wikipedia.org/wiki/TeleSUR.

2) 편집자 주 : 지층이 퇴적할 때에 함께 들어가서 그대로 남아 있는 물.

3) 편집자 주 : 지하수를 품고 있는 지층.

4) 역자주: 리비아는 지난 세기초부터 50년대까지 이탈리아의 식민지배를 받았다.

5) 역자주: 1975년~2002년 사이에 벌어진 앙골라 내전의 초기 상황을 말하고 있다. 앙골라는 과거 포르투갈 식민지로서 해방 운동 당시 쏘비에트 연방의 지원을 많이 받았고 그 중 특히 쿠바와의 관계도 상당히 돈독한 편이었다. 해방 이후 맑스-레닌주의와 반공주의 간의 갈등을 발단으로 1975년 앙골라 내전이 발생하는데, 당시 냉전 상황 하에서 이 내전에 미국과 쏘비에트 연방, 중국이 크게 개입하게 됐다.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와 르완다 역시 당시 쏘비에트 연방과 함께 참전했다. 자세한 설명은 위키 항목 참고: http://en.wikipedia.org/wiki/Angolan_Civil_War )

6) 역자주: 역시 앙골라 내전 기간 중에 있었던 쿠이토 쿠아나발레 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쿠이토 강 전투에서 쿠바와 앙골라 군이 거둔 승리는 곧 평화협정으로 이어져 앙골라 내전 2기는 막을 내리고 1988년부터 1993년까지 앙골라에 평화가 찾아온다. 또한 이 전투에서의 패배를 계기로 피에트 보사의 인종차별주의 정권이 힘을 잃고 만다. 이는 후일 넬슨 만델라의 집권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겠다. 자세한 설명은 위키 항목 참고: http://en.wikipedia.org/wiki/Battle_of_Cuito_Cuanav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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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
(1905)

레닌

테제:
1. 무정부주의는 그것이 존재해온 (바꾸닌 및 1866년의 국제당 대회 이후) 35~40년 동안 (스띠르너를 포함하면, 훨씬 더 오랫동안) 착취를 반대하는 일반적인 공론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산한 바가 없다.
이 공문구는 2000년 이상이나 유행해 왔다. 빠진 것은, (가) 착취의 근원에 대한 이해. (나)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사회의 발전에 대한 이해, (다)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창조적 힘으로서의 계급투쟁에 대한 이해이다.
2. 착취의 근원에 대한 이해. 상품경제의 기초로서의 사적 소유. 생산수단에 대한 사회적 소유. 무정부주의에는 [이러한 것들에 대한 이해가] 없다.
무정부주의는 뒤집어진 부르주아 개인주의이다. 무정부주의의 전반적인 세계관의 기초로서의 개인주의.
{소소유제 및 토지에서의 소농경제의 수호. Keine Majorität(다수에 대한 부인. 즉, 소수가 다수에 복종하는 것을 무정부주의자들이 부인하는 것 - <전집> 편집자). 권력의 통일적 조직적 역량에 대한 부인}
3. 사회의 발전-대규모 생산의 역할-사회주의로의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몰이해.
(무정부주의는 절망의 산물이다. 그것은 불안정한 지식인이나 유랑민의 심리상태이지 프롤레타리아의 그것이 아니다.)
4.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대한 몰이해.
부르주아 사회에서의 정치에 대한 황당한 부인.
노동자들의 조직화 및 역할에 대한 몰이해.
일면적이고, 연계가 끊어진 수단들로 구성된 만병통치약.
5. 라틴계 국가들에서 한때 유행했던 무정부주의는 현대 유럽 역사에 어떤 기여를 했는가?
- 아무런 학리(學理, doctrine)도, 혁명적 가르침이나 이론도 없다.
- 노동자계급 운동을 분열시키고 있다.
- 혁명운동의 실험에서의 완전한 파산(1872년 푸르동주의, 1873년 바꾸닌주의)
- 정치를 부인한다는 구실 하에 노동자계급을 부르주아 정치에 종속시킨디.

번역: 노사과연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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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주 : 원문은 http://www.workers.org/2011/us/egyptian_people_0217/에 있다.]



이집트 인민들이 역사의 무대로 다시 돌아왔다.

가장 서사시적인 순간, 부패한 무바라크 정권과 밀접하게 엮여 있는 자들을 제외한, 사실상 이집트의 모든 주민들이 호스니 무바라크와 그 도당들의 추방을 요구하는 전국적인 민주주의 혁명으로 궐기하였다.

아랍 국가들의 중심인 이집트는 세계를 뒤흔들었다. 그들은 전세계의 제국주의자들과 그 하수인들을 위축시켰고, 전세계의 노동자들과 피억압 인민들이 자신의 힘을 새롭게 자각하게 만들었다. 

바로 이것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이 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민의 힘이다. 8천만 명의 인구를 가진 이집트는 아랍에서 가장 큰 노동계급과 군대를 갖고 있는 아랍 최대의 국가이다. 이집트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3개의 대륙 사이에 위치해 있다. 흔히 “이집트가 가면 아랍 세계도 따라간다”는 말이 있다.

중동에서의 세력관계는 되돌이킬 수 없이 변화하였다. 이스라엘과의 대결로 인해 직접적으로 억압받아온 레바논과 팔레스타인의 피억압 인민들은 이제 그들의 억압자에 대항하는 강력한 조력자를 얻게 되었다.




타흐릴 광장 전투로 투쟁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2월 3일, 빠르게 발전하는 이집트 혁명의 새롭고 더 심화된 국면으로 진입했다. 이틀간 비무장 저항자들은 타흐릴 광장에서 수천의 사복경찰과 정부가 고용한 깡패들과 싸웠으며 2월 3일 승리하였다.

뉴욕타임스 조차도 2월 3일의 기사에서 이 투쟁의 의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랍 세계의 미래는 산산조각난 질서에 대한 경멸과 폭동 사이에 위태롭게 서있다. 그 미래를 위한 위한 싸움이 카이로 도심지의 거리에서 벌어졌다. 격렬한 투쟁의 주간을 보내며, 시민권을 다시 움켜쥔 수만명의 시위대는 몽둥이와 사제폭탄, 돌팔매로 무장하고, 그들의 요구에 폭력으로 응답한 권위주의적 정부의 공격에 굴복하지 않을 것을 선언하였다.

“아랍세계는 이 결정적 순간에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저항과 탄압 중 어느 한 쪽이 승리할 것인가를 지켜보며 기다리고 있다. ‘반란’이나 ‘혁명’같은 단어들은 이미 이집트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의 규모만을 알려줄 뿐이다. 이집트에서의 투쟁은 변화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였고, 특유의 침체상태에 빠져 오랫동안 비틀거려 온 지역인 예멘, 요르단, 시리아, 그리고 심지어 사우디아라비아까지 잔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승리의 환호 속에서, 다음날 수많은 인파들이 타흐릴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그들 중에는, 적어도 현재까지는, 저항자들에게 군대를 투입하지 않겠다고 발표한 이집트의 국방장관인 후세인 탄타위와 다른 육군 고위 장교들이 있었다. 군 지휘관들이 광장을 방문해야겠다고 느꼈다는 사실은 인민의 운동의 힘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그리고 단지 그 뿐이다(군 지휘관은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의미―편집자).




미국과 이스라엘은 봉기를 멈출 수 없다

펜타곤은 전세계에 700여개의 군기지, 지중해에 거대한 해군 함대, 세계를 여러 차례 파괴하기에 충분한 핵무기를 갖고 있었으나, 이집트 인민의 봉기를 막을 수 없었다.

가자 지구를 봉쇄하고, 팔레스티안 인민을 고문하고, 가자와 레바논에서 민간 사회기반시설을 파괴하고 있는 이스라엘도 쏟아져나오는 이집트인들을 막을 수 없었다.

미국 제국주의와 이스라엘의 취약성이 폭로되었고, 워싱턴은 이집트의 투쟁으로 인해 석유가 풍부한 이 지역에 대한 전략적 지배가 수포로 되돌아갈까 두려워하고 있다.

국제위기감시기구의 중동 및 북아프리카지역 사업책임자인 로버트 몰리에 따르면 “이집트와 미국의 관계에 대한 모든 가정은 며칠 사이에 완전히 뒤엎어졌다”고 한다. (NY Times, Feb. 2)

이집트의 저항은 이스라엘 정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스라엘 군 장교들의 전략회의가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국방장관인 에후드 바락은 미 국방장관 로버트 게이츠와 상의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진보진영에서 빼내어 이스라엘과 미국 편에 서게 했던, 이집트와 맺었던 1979년의 조약이 무효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 조약으로 이스라엘은 레바논과 팔레스타인 인민들을 더 강력하게 침략할 수 있었다.

또한 이스라엘과 미국은 이집트 내의 반대집단, 즉 가자의 하마스와 형제적 연대를 맺고 있는 무슬림 형제단을 두려워하고 있다.




미국의 의도

미국 제국주의는 이집트 혁명을 분쇄하려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 대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를 서두르고 있다.

미국은 (이집트의) 군수뇌부와 아주 밀접한 유대를 맺고 있다. 사실 이집트군의 모든 참모부는 폭동이 시작되었을 때 펜타곤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고향으로 긴급히 되돌아갔다. 미국은 결국에는 무바라크를 사임시키고, 펜타곤이 훈련시키고 무장시켜 온 친제국주의적 이집트 군부와 협상하여 결국에는 선거를 조직하되, 동일한 옛 정책은 그대로 보존하려고 한다.

이 계획의 핵심 인물은 부통령으로 새로 임명된 오마르 술래이만이다. 그는 정보기관의 수장이자 고문기술자로 이집트에서 악명이 높은 인물이다. 미군은 비밀스럽게 전세계에서 이른바 “테러” 용의자들을 납치하여, 이집트의 비밀 감옥에 감금하고 고문하는 기구를 가지고 있는데, 술래이만은 이러한 작전의 CIA 교섭창구이기도 하다. 술래이만은 워싱톤과도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상황으로부터의 어떠한 변화도 워싱턴 측에게는 크나큰 모험이며, 바로 이것이 무바라크를 일찍 물러나게 한다는 요구로부터 한발 물러선 이유이다. 이집트 군부는 단일체가 아니며, 뉴욕타임즈의 2월 5일자 기사에 따르면 중간급 장교단의 대다수는 고위 장교의 부패와 특권에 분개하고 있다.




이집트 군부의 계급적 특성

다른 한편 이집트 군부는 인민들을 공격하고 있는 경찰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것은 국가의 무력수단이며, 그러한 무장집단의 존재 자체와 그것을 배치한다는 암묵적인 위협이야말로 자본주의 국가에서 그날그날 벌어지는 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집트의 군대는 제국주의적 개입을 위한 거대한 군사력으로 이루어져 있다. 머릿수로만 보자면 이집트는 미군보다도 두 배 많은 인원을 갖고 있다. 또한 경찰에게 명령을 내리는 무바라크 정부는 동시에 군대도 지휘하고 있다.

다른 한편 이집트 군대는 억압받는 민족의 군대이지만, 진보적인 과거를 갖고 있다. 1952년 가말 압델 나세르는 자유장교단 운동을 이끌어 영국의 꼭두각시인 파루크 왕을 물러나게 하고 권력을 획득하였다.

이집트 군대는 이스라엘에 맞선 4차례의 전쟁으로 명성을 얻었다. 또한 1981년 이집트의 안와르 엘 사다트 대통령이 암살당했을 때, 그것을 실행한 것은 군부 내부의 세력이었다. 그 이유는 사다트가 서명한 이스라엘과의 1979년 협정에 대해 많은 이집트인들이 배신행위로 간주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집트 군대는 징병된 군대이며, 일반 사병들은 많은 이집트 가정에서 안정적인 수입을 제공하는 유일한 사람이다.

타흐릴 광장에 탱크가 진입했을 때, 시위자들은 군대를 환영하였다. 군대가 배치되자마자, 시위자들과 군인들 사이의 유대가 발생하였다. 일반 사병들뿐만 아니라 지휘관들도 시위자들을 환영하고 격려를 보냈다.

만약 군대가 인민에 맞서라는 명령을 받았다면, 많은 병사들이 인민의 편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경찰과 정권에 맞서는 전투를 벌였을 것이다.

CIA의 전 이집트 분석가였던 부르스 리델은 솔직한 평가를 내린다: “그들은 군중들에게 발포할 수 있었고, 다음날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만약 그리했다면 그들을 일거에 쓸어버릴 폭동이 일어날 것이다.” (뉴욕 타임즈, 1. 30)

군대의 하층 계급은 제각기 주둔지에 걸쳐져 있다. 이는 대단히 불안정하고 임시적인 상황이다.





선택지는 무엇인가?

군대는 더 민족주의적이고 반제국주의적인 방향으로 움직이는 장교단 분파로 쪼개어질 수 있다. 일반 사병들이 탈영하여 저항하는 군중들 속으로 흘러들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군부가 현상태로 온전하게 유지된다면, 기회가 닿는 대로 봉기에 반대하여 그 힘을 사용하려는 이집트의 가장 반동적이고 친제국주의적인 세력의 명령을 받게 될 것이다.

시위자들은 2월 2일과 3일에 경찰깡패들이 시위자들을 공격하였을 때, 군대가 가만히 서서 아무 행동도 하지 않은 것에 주목하였다. 타흐릴 광장의 저항자들은 군인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지속적으로 그들과 대화하고, 꾸짖고, 가르치고 있다. <노사과연>




번역: 채주헌 (자료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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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상상하는 인도는 그 어디에도 없다 
인도는 울퉁불퉁하다 
정호영 (지은이) | 한스컨텐츠(Hantz) | 2011-01-21

인도의 정치, 경제, 종교, 문화 등을 다각도로 다룬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이 기존에 인도를 다룬 책들과 다른 점은 ‘우리가 진짜 인도를 알고 있을까?’ 하고 정색하고 묻는 데 있다. 비폭력 성자 간디, 가난하지만 행복한 극빈자들, 거리의 남루한 성자들 등 기존에 낭만적으로 신화화된 인도, 오리엔탈리즘적으로 재구성된 인도의 이미지는 허구임을 역설한다.

간디를 비롯해 크리슈나무르티, 오쇼 라즈니쉬, 마헤시 요기 등 성자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불편한 진실을 들추는 한편, 류시화 작가를 필두로 여러 작가, 학자, 여행가의 글들이 인도를 어떻게 왜곡해왔는지 조목조목 따져보면서, 인도에 관한 통념과 이미지를 뒤집는다.

또한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라 불리는 인도가 극심한 대립과 빈부격차에 시달리는 이유를 추적한다. 극우 힌두 테러 조직부터 합법 공산당들, 극좌 마오이스트 게릴라 조직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이 공존하는 인도의 정치 지형을 다가적인 측면에서 조명한다. 또, 인도가 독립 이후 줄곧 사회주의 경제정책을 펴온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국가자본주의 경제정책을 펼쳐왔음을 보여준다. 더불어 인도의 높은 경제성장률이 지닌 맹점을 짚으면서 경제발전과 빈부격차 개선을 위해 선결해야 할 과제들을 제시한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배낭을 메고 인도로 떠났다가 상상과 너무 다른 현실에 당황하면서도 의문을 풀지 못한 채 돌아오거나 평소 이미지대로만 보고 느낀 채 돌아오고 있다. 이 책은 인도에 관한 기존 선입견들을 씻어주고 인도의 진짜 맨얼굴을 들여다보고 차분히 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자 한다.

1장 | 인도는 신비한 나라가 아니다

01. 인도의 극빈자들은 정말 행복한가
02. 민족종교 힌두교 ― 갠지스 강과 암소 보호
03. 비베카난다의 힌두교와 노동자들의 나라
04. 월드스타 성자의 이면 ― 크리슈나무르티와 오쇼 라즈니쉬
05. 오쇼 라즈니쉬를 지우면 리얼리스트 카비르가 보인다
06. 충격적인 간디의 어록
07. 폭력적인, 너무나 폭력적인 간디
08. 간디의 신앙, 자티 시스템
09. 불교에 대한 힌두교의 대응
10. 위대한 맞수 ― 간디와 암베드카르
11. 21세기의 카스트제도와 간디의 망령
12. 왜 나는 힌두가 아닌가
13. 불쾌한 산스크리트화
14. 가난한 브라만들
15. 이슬람 성자 니자무딘은 모든 종교는 하나라고 했다
16. 니자무딘의 무덤에서 무시되는 여성
17. 아쉬스 난디의 네오간디주의와 그 비판
18. 생물학적 여성성은 답이 아니다
19. 양성성이 답이다
20. 간디와 김구의 죽음
21. 부자가 된 성자
22. 함부로 기부하지 마라
23. 세계화 시대 CEO 모델, 간디
24. 저항의 여신에서 쇼핑몰의 여신이 된 두르가

2장 | 극과 극이 병존하는 정치의 용광로

01. 체스광들과 가상의 인도
02. 국민회의는 영국놈 앞잡이인가, 민족주의자들인가
03. 간디를 떠나 인도 독립운동의 불꽃이 된 바가트 싱
04. 국민회의를 떠난 이들
05. 일본군과 협력한 독립 영웅 찬드라 보세
06.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와 그 규모에 상응하는 부패
07. 달리트 운동과 좌파는 대안인가
08. 인도와 네팔의 마오이스트 공산당은 현재 진행 중
09. 나는 마오이스트의 어머니가 아니다
10. 인디라 간디 시절의 독재
11. 훌륭하신 달라이라마, 지지하기에는 난감한 티베트 프리덤 운동

3장 | 경제성장과 빈곤의 딜레마

01. 인도는 사회주의 정책을 펼친 적이 없다
02. 국가자본주의인가, 사회주의인가
03. 네루 시기의 계획경제와 더불어 시작된 부패
04. 국가자본주의를 강화한 인디라 간디
05. 고용 없는 경제성장
06. 존엄성을 갖춘 발전
07. 1인당 GNP 성장률과 행복
08. IT산업은 인도 경제의 희망이 아니다
09. 한국-인도 간 CEPA 이후에 인도 고급 인력들은 과연 한국으로 올까
10. 아마르티아 센이 지지한 웨스트벵골 좌파 정권
11. 중소기업의 인도 진출은 신중하게
12. 인도 중산층과 볼리우드 영화
13. 인도의 노동운동

4장 | 인도에서 지낸다는 것

01. ‘여행을 떠난 자만이 인생을 알 수 있다’는 말
02. 인도의 언어
03. 인도인들은 게으른가
04. 모른다고 하지 않는 인도인들
05. 속이는 인도인들
06. 채식주의와 브라만
07. 하층 카스트와 인도의 성매매
08. 인도의 대학
09. 인도의 교육 ― 신진영
10. 웨스트벵골의 가능성 ― 윤영현
11. 인도로 배낭여행 떠나기 전 알아야 할 몇 가지 것들 ― 이정미

후기
주석
약어 목록

간디는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스와라지를 쟁취하기 위해 전쟁에 참전해 목숨을 바치라고 독려했다. 많은 젊은이들이 이를 위해서 기꺼이 죽어갔지만, 간디가 원했던 자치는 단지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일 뿐, 달리트들로서는 재산도 전혀 가질 수 없고 병원도 없는 곳에서 ‘요람에서 무덤까지’ 죽어라 일만 하고 자식에게까지 자신과 똑같은 삶을 물려주는 카스트제도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었다. 이것을 과연 비폭력적 사고라고 할 수 있을까. 게다가 간디 자신도 바이샤 계급이므로 농업이나 상업에 종사해야 했지만 크샤트리아의 영역인 정치를 하고 브라만의 영역인 《바가바드 기타》 해설을 했다. 왜 간디는 자신은 죽을 때까지 지키지 않았던 카스트제도를 달리트들에게 강요했는가. ― p.68. <폭력적인, 너무나 폭력적인 간디> 중에서

바가트 싱(Bhagat Singh)은 좌우를 떠나서 인도인 모두의 자랑이다. 바가트 싱과 그의 동료들은 국회의사당에 가짜 폭탄을 터뜨린 후 일부러 잡혀가 법정에서 인도의 반제국주의 운동과 좌파 운동에 불을 댕기고 24세에 교수형을 당했다. 식민지 시대 영웅으로 ‘인도의 안중근 의사’라고 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 바가트 싱과 동료들은 법정에서 영국 제국주의를 비롯해 인도 내 영국 앞잡이들과 착취자들에 대해 격렬하게 비판했다. 그들의 법정 투쟁이 하루하루 진행될수록 저항의 열기 또한 뜨거워졌다. 전 인도는 그들을 구명하기 위해 들끓기 시작했고, 당시 간디와 영국의 인도총독 어윈 사이에 진행되던 간디-어윈협정을 이용하여 그들이 석방되길 기대했다. 그러나 간디는 오히려 국민회의의 회기가 시작되기 전 바가트 싱과 그의 동료들을 처형해달라고 영국에게 간청했다. 회기가 시작된 후 사형이 집행되면 대중의 소요가 걱정된다고 부탁한 것이다. ― p.181, 183. <간디를 떠나 인도 독립운동의 불꽃이 된 바가트 싱> 중에서

인도의 마오이스트들은 선거가 제대로 진행될 수 없을 정도로 인도가 부패했으니 자신들이 선거를 부정하는 것이며, 상층 카스트에 의해 일상적인 착취, 강간, 학살이 이어지고 있으니 마오이스트 공산당 조직들을 중심으로 농민들이 무장하게 된 것이라고 밝힌다. 카스트제도를 중심으로 엮인 인도의 농촌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마오이스트 공산당 조직은 계속적으로 움직일 것이다. ― p.215 <인도와 네팔의 마오이스트 공산당은 현재 진행 중> 중에서

인도에 대한 통념과 환상을 뒤집는 발칙한 인도학

인도의 극빈자들은 정말 행복할까?
마하트마 간디는 정말 비폭력적이었을까?
극우 힌두 조직과 공산당은 어떻게 공존하게 되었을까?
인도에서 테러와 소요가 빈번한 원인은 무엇일까?
IT산업은 인도 경제의 희망일까?

자동차와 소들과 릭샤가 뒤엉킨 도심 풍경, 가난하지만 행복한 극빈자들, 남루한 행색의 성자와 구도자들, 갠지스 강가에서 목욕의식 하는 힌두교 순례자들, 배낭여행자들의 이상향, 아시아 문명과 정신문화 그리고 요가의 요람, 21세기에도 견고한 카스트제도, 빈곤하지만 세계 IT 핵심인력을 배출해온 과학기술 강국, ‘제2의 중국’으로 떠오르는 12억 인구의 신흥 경제대국….
인도는 우리에게 익숙한 나라다. 인도로 (장기든 단기든) 여행을 가본 사람들뿐 아니다. 직접 가본 적 없는 이들에게도 인도는 익숙한 존재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인도를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인도를 알고 있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인도는 진짜일까.

너무나 익숙한 인도, 한없이 낯선 인도

우리에게 인도는 무엇보다 신비의 나라다. 가난한 성자와 구도자의 나라, 철학과 종교의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인류 정신문화의 젖줄, 여행자들이 죽기 전에 꼭 가보길 꿈꾸는 궁극의 여행 천국이다.
다른 한편으로 인도는 거대 신흥시장이다. 12억 인구와 방대한 영토를 지닌 인도는 친디아(Chindia)와 브릭스(BRICs)란 용어가 대변하듯 21세기를 이끌 신흥 경제대국이자 전 세계 기업들이 주목하는 거대 블루오션 시장이다. 아직은 국민 대다수가 극빈층인 가난한 나라지만, 세계적 두뇌들을 배출해온 IT와 과학기술 분야의 강국이기도 하다.
이처럼 인도는 매우 익숙한 나라인 것 같지만, 《인도는 울퉁불퉁하다》는 우리에게 인도가 실상 아주 낯선 나라라고 말한다. 인도는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집권한 공산당 주 정부 및 의회가 존재하는 나라다. 인도공산당(CPI)은 1957년 케랄라 주 선거에서 승리해 집권함으로써 세계 최초로 민주선거를 통한 공산당 집권을 이루었으며, 인도마르크스주의공산당(CPIM)은 1977년 이후 30년 넘게 콜카타(구 캘커타)가 주도인 웨스트벵골 주에서 집권 중이다.
인도는 또한 카스트제도와 마오이스트 공산당이 병존하는 나라다. 카스트제도는 법적으로 철폐된 지 오래되었고 불가촉천민 출신이 대통령, 장관, 하원의장을 역임하기도 했지만, 카스트는 여전히 엄존하는 현실이다. 극우 힌두 조직이 이슬람교도, 기독교도, 불가촉천민 등을 대상으로 무차별 테러를 서슴지 않는가 하면, 극좌 마오이스트 게릴라들이 빈곤과 차별에 시달리는 농촌 하층민들을 파고들어 해방구를 늘려가고 있는 곳이 인도다.
위대한 성자로 추앙받는 ‘비폭력운동의 상징’ 마하트마 간디는 또 어떤가. 간디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카스트제도 유지를 위해서도 단식투쟁을 불사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또 간디가 (향후 자치권을 얻기 위해서였다고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에 협력해 인도 청년들에게 종군하라고 독려했으며, ‘인도의 안중근’이라 할 독립운동가 바가트 싱(Bhagat Singh)을 서둘러 처형해 달라고 식민정부에 요청한 것은 과연 ‘비폭력’적인가.

천의 얼굴을 지닌 인도의 맨얼굴을 직시하는
발칙하고 참신한 인도 입문서


《인도는 울퉁불퉁하다》는 인도의 정치, 경제, 종교, 문화 등을 다각도로 다룬 책이다. 이 책이 기존에 인도를 다룬 책들과 다른 점은 ‘우리가 진짜 인도를 알고 있을까?’ 하고 정색하고 묻는 데 있다. 비폭력 성자 간디, 가난하지만 행복한 극빈자들, 거리의 남루한 성자들 등 기존에 낭만적으로 신화화된 인도, 오리엔탈리즘적으로 재구성된 인도의 이미지는 허구임을 역설한다. 간디를 비롯해 크리슈나무르티, 오쇼 라즈니쉬, 마헤시 요기 등 성자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불편한 진실을 들추는 한편, 류시화 작가를 필두로 여러 작가, 학자, 여행가의 글들이 인도를 어떻게 왜곡해왔는지 조목조목 따져보면서, 인도에 관한 통념과 이미지를 뒤집는다.
또한 이 책은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라 불리는 인도가 극심한 대립과 빈부격차에 시달리는 이유를 추적한다. 극우 힌두 테러 조직부터 합법 공산당들, 극좌 마오이스트 게릴라 조직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이 공존하는 인도의 정치 지형을 역사적, 사회적, 경제적인 측면에서 조명한다. 또, 인도가 독립 이후 줄곧 사회주의 경제정책을 펴온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국가자본주의 경제정책을 펼쳐왔음을 보여준다. 더불어 인도의 높은 경제성장률이 지닌 맹점을 짚으면서 경제발전과 빈부격차 개선을 위해 선결해야 할 과제들을 제시한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배낭을 메고 인도로 떠났다가 상상과 너무 다른 현실에 당황하면서도 의문을 풀지 못한 채 돌아오거나 평소 이미지대로만 보고 느낀 채 돌아오고 있다. 또 많은 기업(가)들과 자영업자들이 한때의 중국 러시처럼 거대 시장 인도를 겨냥해 섣불리 진출하고 있다. 여행이든, 비즈니스든, 아니면 단지 지적 호기심이든, 인도의 본모습을 바로 볼 때 시행착오나 오해 없이 제대로 인도와 만날 수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 점에서 이 책은 인도에 관한 기존 선입견들을 씻어주는 해독제이자 인도의 진짜 맨얼굴을 들여다보고 차분히 알아가는 작은 거울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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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sam 2011/01/29 11:01

    1장 제목부터 심하게 끌리는구만요 사야겠습니다ㅎㅎ
    그나저나 어제는 잘 계시다 들어가셨습니까??

    • Punk77 2011/01/29 20:34

      연말연시에 찍힌게 많아 일찍 들어갔다..ㅎ
      책은 나도 아직 못봤다만 읽는 재미도 좀 있을거다..

Ser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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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주의 Racism

책속으로 | 2010/12/28 02:18 | Punk77
출처: 현대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전
1989, 백산서당
소련과학아카데미 편
강종수 옮김

인종주의 Racism

인종주의는 인종에 따라 육체적ㆍ정신적으로 다르다는 비과학적이고 혐오스런 관념과, '열등한' 인종에 대한 '우월한' 인종의 지배 가능성과 필연성에 근거한 심리적ㆍ이데올로기적ㆍ사회적 실천이다. 인종주의는 민족주의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양자는 서로를 부양하고 강화한다. 인종주의의 사상가들은 인종과 민족적 차이가 영원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러한 관념이 문화와 사회의 발전에 미치는, 그리고 민족적ㆍ인종적 억압과 제국주의적 팽창, 약소국의 식민지화, 원주민에 대한 대량학살(민족 및 종족근절)의 적당한 명분에 미치는 영향력을 자신들의 반과학적 사고의 기초로 삼는다. 인종주의는 인간의 본질을 인간의 생물학적 기원에 한정시키고, 민족과 국민의 장단점을 얼굴ㆍ머리ㆍ코ㆍ입의 모양과 피부ㆍ눈ㆍ머리카락의 색깔 등과 같은 불변적 특징이나 그러한 생물학적 기원에 국한시킨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접근을 비난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특정한 개성의 본질은 수염이나 피, 추상적인 육체적 특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적 질에 있다"(Marx, Engels, Collected Works, 제3권, p.21)

인종주의는 노예소유제사회에서 최초로 등장했는데, 노예에 대한 노예소유주의 자연적 우월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리고 중세기에는 농노 즉 착취받는 대중에 대한 귀족의 우월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자본의 원시적 축척의 시작과 함께 이러한 철학은 식민지에 대한 지배와 무자비한 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뒤에 민족이나 인종을 근절시킨 경우는 아메리카인디언 아프리카나 남부아시아의 여러 지역, 오스트레일리아나 오세아니아의 흑인들에게서 볼 수 있다. 이러한 경우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자본주의하에서 인종주의는 다윈의 자연도태설과 적자생존설을 사회에 적용한 사회적 다위니즘을 사용하고, 맬더스주의와 우생학(인간의 유전형질과 인종의 개량에 관한 이론)을 사용한다. 이것은 물론 근로민중에 대한 지배계급의 우수함, 어떤 민족이나 인종에 대한 다른 민족이나 인종의 유전형질의 우수함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 파시즘ㆍ시오니즘, 그리고 남아프리카공화국과 같이 독점자본에 의한 인종분리정책 등은 그러한 관념과 인종주의적 결합이 가져온 가장 위험스런 결과이다. 이러저러한 유형의 인종주의는 민족적 적대감과 갈등, 그리고 파괴적인 전쟁을 야기시킬 목적으로 다양한 민족주의적 관념을 조작해 왔다. 독일인종의 배타성이론은 독일파시즘이 자신의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했던 가장 주요한 논거이다. 독일파시즘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하나의 지배민족 아래 새로운 세계질서를 확립한다는 미친 관념을 실현하려고 노력했다. 시오니즘은 '세계유태민족'이라는 잘못된 반동적 관념으로부터 출발하여, 자신들이 약속된 땅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갖고 있는 선택된 특별한 초영토적 민족이라고 주장한다. 시오니즘과 파시즘은 동일한 혐오스런 이데올로기와 동일한 인종적ㆍ군국적 정책을 가지고 있다. 파시즘과 시오니즘이 서로 반대의 목적을 추구하면서도 - 파시즘은 유태민족(및 기타 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독일민족을 결속시키려 했고, 시오니즘은 모든 비유태민족을 반대하여 '세계유태민족'의 신화로 유태민족을 결속시키려 한다 - 자신들의 반동적인 이데올로기와 정책을 유지하기 위해 또 다른 종류의 인종주의인 반유태주의를 이용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인종주의의 모든 형태는 반과학적이며 반동적이다. 오늘날의 인류학은 모든 인류가 '호모사피엔스'라는 단일한 종의 문화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이러한 결론이 인종발생에 관한 단일중심적 가설이나 다중심적 가설 모두에 반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다중심적 가설이 언젠가 인류학적 연구나 새로운 고고학적 발견에 의해서 확인된다면, 다양한 시기에 다양한 지역에서 동물과 질적으로 다른 종으로서의 인간의 출현에 관한 문제가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인간의 전역사적 종에 관한 수많은 발견은, 모든 민족이 그들이 지구에 등장한 시기나 지리적 분포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무한한 능력을 가진 인간적 정신과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모든 인종이 자신의 독립된 발전의 길을 따라간다는 가정은 잘못된 것이다. 반면에 인종발생에 관한 다중심주의적 가정은 올바르다. 왜냐하면 인종형성에서 '순수한' 길이란 없기 대문이다. 인종발생의 주요한 특징은 인종의 적응력이다. 첫째, 인류의 원래의 인종적 계통은 역사 이전인간의 다양한 유형에서가 아니라 다양한 지역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둘째, 이러한 계통으로부터 줄기는 똑바로 혹은 평행해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서로 교차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러한 견해는, 인종이란 단순한 동형태를 공유하고 있는 개인들의 집단이 아니라 다양한 지리적 위치에 따른 환경차이와 인종 사이에 역사적으로 형성된 관계에 의해 구별된다는 개념에 의해 지지되었다. 인종의 진화는 자연적인 요인과 사회경제적 요인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다. 인류학자와 인종학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인종적 특징은 일시적 정지(라틴아메리카에서와 같이 흑인과 인디언 그리고 유럽인이라는 삼중결합에 의한)의 결과로, 그리고 새로운 환경적ㆍ사회적 조건의 영향하에서 변화한다.

성장의 가속화와 조기성숙 등 인류발전의 새로운 경향이 많은 나라에서 보여지고 있다. 이것은 모두 복잡한 사회적 환경에 의해서 설명된다. 머리의 둘레나 넓이, 두개골 지표의 점차적 변화(두개골 지표는 머리 넓이와 머리 길이의 관계이다), 얼굴 넓이의 축소, 또한 최근에 관찰된 두개골과 뼈의 길이 확대와 같은 변화과정은 모두 가속화하는 경향이 있다.

다양한 인종의 신체구조에 관한 생물학적ㆍ생리학적 주장을 확증하지 못하고 있는 대다수 현대 인종학자들은 흔히 심리인종주의에 매달린다. 그들은 인종이나 민족의 열등성을 그들의 특별한 도덕성이나 심리적 구조 속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과학은 역시 이러한 측면에서의 인종주의를 폭로한다. 오늘날 순수한 인종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단일한 인종적 혈통을 가진 민족이나 국민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류는 뒤섞인 인종의 복합체이며, 동시에 그들의 후손이고 혼합된 인종집단이다. 인류학적 특징은 새로 배합되어 계속해서 나타날 것이다. 인류의 발전은 문화적ㆍ정신적 발전이나 언어ㆍ민족성이 종에 의존하지 않음을 증명한다. 소비에트 민중의 성취나 다른 사회주의 나라의 민중, 그리고 사회주의적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발전도상국 민중의 성취는 민족의 사회경제적ㆍ문화적 진보가 그들의 사회체제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지 인종적 구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진보적 인류는 인종주의의 부끄러운 이데올로기와 사회적 실천에 반대한다. UN총회도 인종주의와 인종적 차별을 완전히 청산해야 한다는 결정을 채택했다. 가장 정의로운 사회인 공산주의 - 여기서는 인종주의의 모든 현상이 제거된다 - 를 건설하고 있는 민중은 이러한 투쟁의 선봉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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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28 02:18 2010/12/28 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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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편]시인에게

책속으로 | 2010/10/11 13:16 | Punk77
시인에게

예고르 예피모비치 네차예프(1859~1925)

시인이여, 꽃들을 상관하지 말고 내버려둬라,
황금빛 노을들에 관해 노래하지마라,
푸른 하늘에 대해 잊어라,
그것들의 매력에 관해 노래할 시간이 없다.

광활한 초원의 아름다움에 관해
침묵을 지켜라, 시인이여, 더 나은 날까지,
사람들의 불안한 가슴을
너는 부드러운 노래소리로 잠재우지마라,
사납게 울부짖는 바다를 찬미하지마라,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부서지는 파도를......
조국에서는 얼마나 많은 눈물과 슬픔을 겪게 되는지를 너는 보는가?...

너는 조국에 관해 노래하라,
잠자코 있지 않으면서, 가슴이 말하는 것에 관해,
자유롭게 살아있는 노래가
잠재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생기를 불어넣게 하라

1910년

출처
러시아 노동혁명시: 프롤레타리아의 노래(1990, 솔밭)
- 보그다노프 외 지음/임채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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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3일 피델 카스트로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 아바나 대학에서 "쿠바 대학생들에게 주는 메시지" 제목으로 연설을 했습니다. 피델은 이 연설에서 미국과 이스라엘의 대이란 핵전쟁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고 세계평화의 공고화와 지구온난화로부터 지구를 지키는 투쟁을 포기하지 말 것을 촉구했습니다. 나아가 승리할 수 있다고 역설했습니다. 영어 연설문을 한글로 번역하고 동영상에 한글자막을 넣는 편집작업을 했습니다. 영문과 스페인어 원본도 함께 첨부합니다. 번역, 편집 : 전태일 노동연구소] 


친애하는 동지들!

나는 햇볕이 너무 뜨거워지기 전인 이른 시각에 여러분과 만나자고 말을 전했습니다.

나는 이 계단을 다시 찾아오리라고 전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피델은 아바나 대학을 졸업했다: 역주]. 이 계단에 서니, 내가 우리 시대를 알게 되고 우리의 의무를 처음 깨달았던 그 시절의 잊지 못할 기억이 떠오릅니다. 사람은 평생에 걸쳐 지식을 쌓고 깨달음을 얻지만 젊은 시절만큼 순수하고 사심 없이 인생을 대면할 때는 없을 것입니다. 그 시절에 나는 내 진정한 숙명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나는 65년 전에 함께 했던 수많은 동지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쿠바의 유일한 대학이었던 이 대학에 들어왔던 때는 9월 첫째 주였습니다[이 연설을 한 날도 9월 3일이다: 역주]. 내가 그 동지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찾아보려고 하지 않고, 그들 모두가 젊고 열정에 충만했으며 대부분 사심 없이 순수했던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을 고이 간직하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입니다.

나는 그 시절의 우리도 그러했지만, 오히려 그때보다 훨씬 잘 교육받고 더 자유롭고 더 각성된 젊은이들과 함께하게 되어 참으로 기쁩니다.

그 시절에는 폭압정권과 야만적인 폭력이 이 대학 언덕을 유린했고, 비양심과 부정부패가 우리 사회를 뒤덮었습니다.

스페인 자원병(自願兵)이라 불린 약탈자들이 대부분 쿠바인이면서도 스페인 폭정의 앞잡이로 날뛰었습니다. 그들에게 대량학살된 대학생들 덕분에, 독립운동의 선구자들과 세 차례의 독립전쟁 와중에 스러져간 수만 명의 애국자들 덕분에, 바로 우리를 앞서간 선조들 덕분에 우리는 우리의 투쟁을 고무하는 정말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훨씬 더 강력한 제국[미국: 역자]이 우리 조국과 민족적 양심을 지닌 숱한 사람들을 접수하여, 식민지라는 거대한 멍에를 벗어날 수 없다는 식의 숙명론을 퍼뜨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제국의 식민지가 마땅히 되어야 했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더 나쁜 것은, 강력한 착취세력이 이 사회에서 생겨났던 것입니다. 그들은 제국의 이익에 봉사하여 우리 인민의 재산을 약탈하고 총칼로 인민을 억압하고 무지몽매한 상태에 묶어 두었습니다. 그들은 빈번히 일부 쿠바인들을 앞잡이로 고용하여 바로 그들 자신의 형제자매들을 고문하고 살해하도록 했습니다.

혁명은 그들이 불러일으킨 공포를 끝장냈습니다. 우리가 이 9월의 아침에 여기서 만날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덕분입니다.

그날의 승리 이후, 우리가 얼마나 멀리 나아갔는가를 생각해 봅시다. 한때는 인류의 정의와 행복이 인민들의 최고 목표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우리는 그보다 더 높은 목표와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세계를 전 지구적 자본주의로 통합하여 상상할 수 없는 약탈을 자행하는 세력들, 그리고 오늘날 바로 인류의 생존 그 자체를 위협하는 시스템을 부과하는 그 세력들에 대항하는 투쟁의 부담을 쿠바 같은 작은 나라가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나는 우리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민족들의 삶에 불가결한 전 세계의 이익이라는 구실로, 인민들의 생존과 행복을 우리의 목표로 삼기를 중단할 정도로, 그런 목표들은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민족해방 및 사회해방 투쟁에서, 이 남반구의 스페인 식민주의의 보루인 우리 나라가 최초로 스페인에 점령당한 나라요, 400년 이상이 지난 뒤에야 그 멍에를 벗어버린 마지막 나라라는 것도 확실합니다.

민족해방을 위한 우리의 투쟁은 사회해방을 위한 우리 나라 노동자들의 집요한 노력과 함께 섞였습니다. 그것은 의지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운명에서 나온 행동이었습니다. 쿠바 인민이 훌륭한 것은 이 둘 간의 뗄 수 없는 유대(紐帶)를 이해하고 그것을 강화하는 방법을 알았다는 점입니다. ("피델 만세!" 갈채와 환호)

인류가 이 투쟁을 벌여야 하는 시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제한되어 있습니다. 나는 우리 지구상의 인류의 삶을 위협하는 끔찍스런 위험을, 이에 무관심한 세계에, 폭로하기 위해 석 달 이상 끊임없는 노력을 겸허하게 기울여 왔습니다. 그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일입니다. 나는 우리가 중세 기사도와 철검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는 것 외에 뾰족한 수가 없습니다. 그 시대의 무기는 수세기 이전에 성벽을 깨뜨렸거나 깨뜨리려고 하는 공성(攻城) 망치에 뒤이어 등장했던 석궁(石弓)이거나, 또는 말이 끌고 수레바퀴에 칼이 달린 전차(戰車)였습니다. 요컨대, 인간이 철퇴를 발명한 이래 전쟁에서 사용한 무기들은 언제나 잔인한 것이었지만 1, 2차 세계대전 전까지는 그 파괴력이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1, 2차 세계대전에서는 자동무기가 사용되었습니다. 탱크, 전투기, 하늘의 요새[2차 대전 때 미군이 사용한 전투폭격기 보잉 B-17: 역주], 잠수함, 어뢰, 장갑차, 그리고 항공모함들 말입니다. 이 무기들이 전쟁에서 불가피하게 수천 만 명의 생명을 앗아갔고 수억 명의 파괴의 피해자, 부상자, 병자, 기근자를 만들어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날 무렵 두 개의 핵무기가 사용되었습니다. 그 전까지 인류는 그렇게 끔찍한 파괴와 절멸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60여 년 전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폭탄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인류가 축적한 핵무기의 파괴력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폭탄의440배로 커졌습니다. 그것은 사실이고, 수치가 말하는 바 대로입니다. 이렇게 대단히 슬픈 현실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과 그 원인들에 대해 말하려면 다소 거친 말을 써야 하므로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죽음과 파괴의 끔찍한 수단을 사용한 최초의 사람들이 가진 경제적, 군사적 지배욕이 실제적인 인류의 절멸 가능성을 낳고 있고, 이는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여러분이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 내가 여러분에게 주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날 70여 억 명인 인류의 문제는 그런 비극이 일어나는 것을 막는 일입니다.

나는 정책이나 정부에 책임이 있는 온갖 수치스런 일들로 인한 고통스런 진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즐겁지 않습니다. 이 진실은 세상으로부터 교묘하게 감춰져 있고, 인류가 직면한 실제 위험을 인류에게 경고하는 어려운 과업이 쿠바에 떠맡겨졌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조금도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회의론자들과 대면하더라도 우리의 명백한 의무는 투쟁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세계의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현실을 자각해 가고 있습니다.

멕시코의 권위 있는 신문인 라 호르나다(La Jornada) 사장의 8월 30일자(월요일) 인터뷰의 초반부를 쿠바 디베이트(CubaDebate) 웹사이트에서 읽은 아메리카 대륙의 한 시민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는데, 매우 뜻깊은 의견이라서 쿠바 대학생들에게  보내는 이 메시지에 그 요점을 포함하기로 했습니다.

"나는 오늘날 군사적 갈등에 연루된 모든 나라들에 외칩니다. 제발, 진정한 평화를 이루는 일에 관하여 언제나 생각해 주세요. 그것이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 우리의 손자손녀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류, 모두가 당신들에게 감사할 것입니다. 우리는 나날이 살기 어려워지는 지구에서 평화롭고 안전하게 살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핵무기는 사라져야 하고, 어떤 나라도 그것을 보유해서는 안 됩니다. 원자력 에너지는 오직 좋은 목적으로만 사용돼야 합니다. 유일한 진정한 승리는 평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두 개의 커다란 도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세계평화의 공고화와 기후변화로부터 지구를 구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전자는 굳건한 기초 위에 영구 평화를 성취하는 것이고, 후자는 기후변화를 되돌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이러한 문제들과 우리가 달성해야 하는 변화의 주인공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난 세기의 전경(全景)은 이번 세기와는 달랐습니다. 이 시대에 전쟁 무기는 훨씬 더 정교하고 치명적이며, 지구는 더 취약하고 더욱 오염되어 있습니다.”

“칸쿤에서 열린 기후변화정상회의 […] 유일한 기회가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 우리는 되돌아올 수 없는 임계점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 순간이 되면 두려움이 커져서 다들 우리의 생명을 구하려고 무엇이든 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쯤은 이미 모든 것들이 소용 없고, 너무 늦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기회는 우리 앞에 딱 한번 나타날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활용하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어머니 자연은 아직 중독되지 않은 간접 흡연자와 같습니다. 우리는 마구잡이로 자연을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누구도 어떤 인간, 나라 또는 민족에 대하여 폭력을 사용할 권리가 없습니다. 누구도 자신이 처음에 심지 않은 나무를 자를 수는 없습니다. […] 우리는 자연에게 등을 돌릴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우리는 언제나 자연을 힘껏 껴안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자연이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색깔과 소리, 균형과 조화가 어우러진 것의 일부입니다. 자연은 완벽합니다.”

“교토는 인류 모두에게 희망을 의미했습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고, 지구상에는 공기 중에도, 우주에도 안전한 장소가 없어질 것입니다. 태양광선이 갇혀서 지구 표면에 날마다 더 많은 에너지를 방출하기 때문에 생기는 온실효과로, 매일 커다란 에너지가 축적됩니다. 그것이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자연재해를 초래합니다. 이 재앙을 멈출 버튼을 가진 사람이 과연 지구상에 존재할까요?”

“…우리는 우리를 약화시키고 우리의 에너지를 죄다 소모하는 전쟁에 시간을 낭비할 수 없습니다. 적들이 전쟁을 만듭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적으로 보게 하는 모든 원인을 근절합시다. 전쟁에서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이것이 그들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감정대로 반응하고, 평화에 이르는 길이 전쟁이라고 잘못 생각하면서 자신의 양심을 외면합니다. 난 한치의 오류도 없이 말합니다, 평화는 평화로써 달성됩니다. 그리고 당신이 평화를 원한다면 당신의 양심을 변화시킬 준비를 하십시오!”(박수)

이것이 그의 말 중에 핵심적인 대목입니다. 아주 명료하고, 지구상의 누구라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내가 이 메시지를 작성하고 있던 9월 1일(수요일), 쿠바 디베이트 웹사이트에 다음과 같은 뉴스가 올라왔습니다. “이스라엘이 미국과 함께 이란 핵시설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일련의 새로운 정보 누설은 [심리전이나 넘겨짚기 보도가 아니라: 역주] 실제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명망 있는 스트래트포어(Stratfor) 센터의 상임이사 조지 프리드만이 화요일에 간행된 논문에서 말했다. 이 논문은 몇몇 전(前) CIA 분석요원들이 그 공동저자이다.” 그는 학식이 있고 명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뉴스는 계속됩니다.

“다양한 판본의 이슬람 공화국[이란: 역주] 공격설이 확산되었던 적이 많았다. 이러한 공격설은 아마 비밀정보기관들이 걸러낸 정보들일 것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는 서방측과 합의하도록 테헤란에 심리적 압박을 가하려는 시도와 관련돼 있었다.”

“…이 수법은 효과를 보지 못했고, 그것이 똑같은 목적으로 다시 사용될 가능성은 매우 적어 보인다고 프리드먼은 말한다…”

“’그것은 역설이다. 하지만 전쟁에 관한 숱한 새로운 루머들은 이번에는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이란을 확신시키려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면서 실제로는 전쟁이 준비되고 있다.’…”

“분석가[프리드먼; 역주]는 텔아비브[이스라엘: 역주]가 펜타곤[미 국방부: 역주]의 지원을 고려하지 않은 채 군사작전에 착수할 만큼 무모하다는 사실을 완전히 기각한다.”

“동시에, 이란에 대한 공격이 초래할 가장 심각한 결과는 이란이 오만과 페르시아만 사이에 있는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여 세계 원유 공급의 45%를 중단시키는 것이고, 그 결과 하늘 높이 치솟을 유가(油價)가 경기침체 후의 세계경제 회복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라고, 전문가는 경고한다.”

그 뉴스는 그렇게 끝났습니다.

공격에 대한 두려움이 원유가격에 나타날 결과와 경기침체에 대한 대응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믿을 수 없습니다. 이란의 전통적인 해답[미국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맞서는 것: 역주]을 받아들일 수 없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입장이 격렬한 전쟁을 촉발시킬 것이고, 그 전쟁의 통제가 전쟁 당사자들의 손을 벗어나서 결국 치유할 수 없는 전 지구적인 핵전쟁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점을 나는 조금도 의심치 않습니다. 그것이 내가 주장하는 바입니다.

“전 영국 수상인 토니 블레어가 이번 주 수요일에 BBC인터뷰에서 출간예정인 자신의 회고록에 대해 소개하는 가운데, 이란이 핵무기를 개발한다면 국제사회는 군사적 선택 이외의 대안을 갖고 있지 않다고 경고했다.”고 AFP의 주요 특파원이 전합니다.

그 보도는 계속됩니다.

“그들이 계속해서 핵무기를 개발한다면 이에 대한 대안은 없다고 생각한다고 블레어는 결론지었다. 그는 이미 미국과 이스라엘에 의해 여러 번 반복되었던 협박을 그대로 따라 하면서, 이란이 크고 분명한 이 메시지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물론 그들은 이란이 핵무기를 제조하고 있다는 증거를 갖고 있지도 않고, 가질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란은 몇몇 연구센터를 이용하여 연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년 내지 3년 동안 그들 스스로 인정했던 것처럼, 이란은 폭탄제조를 시작할 어떠한 물질[고농축 우라늄: 역주]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강대국들이 2만 5천 개의 핵무기를 갖고 있고, 그들이 갖고 있는 재래식 무기의 위력이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라는 점은 고려하지 않고서, 이란이 핵무기를 제조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증거가 없습니다. 연구센터만 있습니다. 그것이 이란을 공격할 이유입니까? 우라늄에서 전기에너지를 생산하는 공장을 갖는 것은 범죄가 아닌데도, 그들은 그것이 이란이 핵무기를 제조하고 있는 증거로 여깁니다. 그들은 이미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1981년에 이라크 연구센터에 대해서도 그렇게 했고, 2007년 시리아 연구센터에 대해서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들은 [최근에: 역주] 그러한 사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들이 그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는지 다소 의문입니다.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고 아무도 글을 쓰지 않는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 원자로들과 연구센터들을 공격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약 그들이 (핵무기를 제조하려고) 한다면”이라는 그 하찮은 말에 현혹될 수 없습니다.

러시아 국영통신사 이타르타스에서 보낸 새로운 특보에 따르면, “대이란 제재는 바랐던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고 이란 문제는 무력수단에 의해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오늘 러시아 외무장관 세르게이 라브로프가 ‘무엇이 일치인가’라는 제목으로 모스크바 국립국제관계대학(MGIMO) 학생들에게 한 연설에서 이처럼 말했다.”

뉴스 내용을 더 소개합니다.

“우리는 어떤 세계문제도 무력을 써서 해결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라고 라브로프는 말했다. 그는 이란에 관한, 특히 이란과 협상하는 문제에 관한 미국 대통령 바락 오바마의 입장을 주목했다. 그는 미국-이란 관계의 정상화를 환영한다고 덧붙였다.”

러시아는 거부권을 가진 유엔 안보리 이사국일 뿐 아니라 그 의견이 무시될 수 없는 강대국이라고 생각합니다. 6월 9일의 결의안을 의결할 때 거부권을 가진 모든 나라들이 그 결의안을 지지했던 사실과는 별개로, 터키와 브라질은 지지하지 않았고 레바논은 기권했습니다. 그 결의안이 가결되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결의안은 이란 상선을 감시할 것을 인가했고, 90일 조항[90일마다 위반사항을 작성, 보고하는 조항: 역주]을 설정했습니다. 7일인가, 9일에 그것이 끝난다고 합니다. 또한 그들이 공격할지 말지를 그 날 그들은 통보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는 지켜봐야 합니다. 이 상황에서 그들이 무엇을 할지, 그들이 세계 여론을 어떻게 평가할지, 그 조치가 얼마나 효과를 미칠지, 그들이 또다른 조항을 만들어내지는 않을지, 그럴 의사가 없다고 선언할지 아니면 그 방침을 승인할지를 지켜봐야 합니다. 사태를 판단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긴박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상황을 시시각각으로 추적할 수 있게끔 우리에게 알려줄 것을 정보 미디어들에게 촉구해야 합니다.

전자 미디어 덕분에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유력한 자본주의 기업의 수중에 있는 뉴스 기관들과 정보 미디어들이 침묵을 지킨다 해도 세계가 그에 관해 알게 되는 것을 그들은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처럼 말하는 것은 수많은 메시지가 도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하나를 읽어보겠습니다. 4시 52분, 4시 54분, 그리고 4시 55분에 왔습니다. 이 메시지를 뽑은 동지는 그것들이 남미에서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왔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것들 모두를 논평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보내온 메시지들은 여러분이 신뢰할만하듯이, 매우 신뢰할만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하고, 그래서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와 같은 상황을 여지껏 겪어본 적 없는, 새로운 단계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그리고 각성하려고 하는 모든 동포들에게, 또한 사태를 알려주는 언론 미디어들에게 제안합니다. 때때로 국제언론은 이상하게도 침묵을 지키고, 그러다가 갑자기 일련의 뉴스가 터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다음에 터져나올 것들이 좀더 관심을 끌 것입니다.

이 사건들이 드러나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아무도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7일에, 9일에, 15일에, 20일에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누구나 자기 나름의 계획을 세우듯이, 우리는 우리 계획을, 작업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나로서는 당분간 이 일에 집중할 것입니다. 최대한 많은 정보를 모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두에 있어, 우리 모두는 그 일의 일부를 맡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각자의 생업을 중단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 책무의 일부를 맡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매우 중요한 나라를 마지막으로 언급하겠습니다. 어제 오후, 가장 늦은 방송에서 보도했기 때문입니다

로이터통신의 속보에 따르면, “중국이 대이란 제재에 따르도록 유럽연합이 압박하고 있다”고 합니다.

잘 알려진 6월 9일의 1929호 결의안 말고도, 유럽과 다른 지역들의 (미국) 위성국가들은 이란의 목을 조르는 추가제재를 부과했고, 이 추가제재의 실행과 관련하여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그들의 불만을 토로했기 때문입니다. 기사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그 제재 때문에 이란을 포기한 다른 기업들이 남긴 빈 자리를 중국 기업들이 채우지 않도록 보장하라고 중국이 압력을 받았다고 지난 목요일 유럽연합 대외정책 담당관 캐더린 애쉬톤이 말했다...” 그 기사는 그 제재가 안보리 제재인지 추가제재인지 밝히지 않았지만, 물론 그 모두를 언급하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정직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오늘날 세계를 위협하는 매우 중대한 문제의 복잡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동지들, 아바나 대학생들! 멀어 보이지만 내게는 어제처럼 느껴지는 다른 시대에 그랬듯이, 나는 여러분이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이 너무 고맙습니다. 평화를 위한 이 투쟁에 여러분이 도덕적 지지를 보내고 있다는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박수). 여러분이 이 투쟁을 포기하지 말도록 촉구합니다. 과거의 다른 많은 경우에 그랬듯이, 우리는 이 싸움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박수).

인간 생명이 보존되기를 기원합니다! 어린이와 청년들이 정의로운 세상에서 삶을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부모와 조부모들이 그들과 함께 삶의 특권을 나누기를 기원합니다!

인류는 놀라운 생산력 발전을 통해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부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이 부의 공평한 분배, 이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대안입니다.

대단히 고맙습니다.  2010년 9월 3일(환호)

[번역 : 전태일 노동연구소]

[영어]

MESSAGE TO THE UNIVERSITY STUDENTS OF CUBA

My dear comrades:

I asked that we meet early, before the heat of our sun becomes too intense.

This stairway, to which I never imagined I would be returning, keeps some indelible memories of the years when I began to become aware of our era and our duty.  One can acquire knowledge and awareness throughout one’s lifetime but never in any other stage of one’s existence will a person again have the purity and selflessness with which, being young, one faces up to life.  At that age, I discovered my true destiny. 

Thus it is inevitable that, at these moments, I am accompanied by the memory of so many comrades whom I knew exactly 65 years ago.  It was during the first week of September that I entered this University, the only one in the country.  It is best that I don’t even try to ask for each one of them, and I just hold on to the memory of when they were all young and full of enthusiasm and, as a rule, selfless and pure. 

I am extremely encouraged to have present those who today, as we were in yesteryear, even incomparably more well-educated, freer and more aware. 

In those days, the power of the brute force and the brutality of force fell upon this university hill, the lack of conscience and the corruption applied upon our people.

Thanks to the example of those preceding us, to the students massacred at the demand of the hordes called the Spanish volunteers, many of whom were born in this country who took up service for the Spanish tyranny, thanks to the Apostle of our Independence and to the blood spilt by dozens of thousands of patriots in three wars of Independence, we have really been preceded by a history which inspired our struggles.  We didn’t deserve to be a colony of an empire that was even more powerful, that took over our Homeland and a good portion of our national conscience, sowing fatalism with the idea that it was impossible to shake off such a hefty yoke. 

Worse still, a powerful exploiting sector had arisen which, at the service of the Empire’s interests, was plundering the wealth of our people, keeping them shackled and ignorant by force and, not on a few occasions, using others born in the country to act as the torturers and murderers of their own brothers and sisters. 

The Revolution put an end to those horrors and it is because of that that we are able to meet here on this September morning. 

How far away we were after the triumph to think that, on an occasion like this, we would be returning to meet in efforts even greater and with higher aims than those which, at a certain time, seemed to us to be the highest goals of peoples, in the name of justice and happiness for human beings. 

It would not seem to be possible that a country as small as Cuba would be seen forced to carry the weight of the struggle against those who have globalized and submitted the world to an inconceivable plunder, and have imposed a system which today is threatening the very survival of humankind. 

I am not speaking only in favour of the interests of our nation.  One might say that such objectives have been left behind, in the measure that existence and the well-being of peoples stopped being our objectives, in the name of world interests, without which the life of nations is impossible.  It is also certain that, in our struggles for national and social emancipation, our country, the bastion of Spanish colonialism in this hemisphere, was the first to be occupied and the last to rid itself of the yoke after more than 400 years of domination. 

Our struggle for national liberation was mixed together with the tenacious efforts of the workers of our country for their social liberation.  It was not an act of will; it was an act of fate.  The merit of the Cuban people is that they knew how to understand and strengthen the indissoluble bonds between both.  (Applause and cries of “¡Viva Fidel!”)

The time humankind has to fight this battle is incredibly limited.  Throughout more than three months of unceasing struggle I modestly made the effort to reveal, to an inattentive world, the terrible dangers that threaten human life on our planet.  It is well-known, and I have no other alternative than to remember the fact, that we are not living in an age of chivalry and the steel of the swords accompanied by crossbows that were preceded for centuries by battering rams that demolished walls or tried to do so, or war chariots drawn by horses with knives mounted on the wheels; weapons, in brief, always cruel, but with limited destructive power that humans used to wage war on each other since they invented the mace, up to World Wars I and II, when automatic weapons were used , tanks, combat planes and flying fortresses, submarines, torpedoes, armoured vehicles and aircraft carriers that raised the toll of lives lost to tens of millions of humans, and to hundreds of millions of victims of destruction, the wounded, the sick and the hungry, inevitable consequences of wars. 

Two nuclear devices were used at the end of the last war.  Mankind had never before conceived such terrible destruction and extermination.  More than 60 years ago we speak of the bombing of Hiroshima and Nagasaki; with that we have indicated that the destructive power of accumulated weapons is equal to more than four hundred and forty times the power of one of those bombs. That’s how it is, that’s what mathematics tells us.  I add no more because I would have to use rather tough words about the causes and the people responsible for that extremely sad reality. 

But that was not enough.  The desire for economic and military domination by the first ones to use those terrifying instruments of destruction and death lead humankind to the real possibility of dying out, which we face today.  I don’t need to give you arguments for something you already know very well.  The problem of peoples today, shall we say, of more than seven billion human beings, is to prevent that such a tragedy should occur.   

I am not happy speaking about the painful truth that constitutes something of shame for everything that is identified as policy or government.  This truth was deliberately hidden from the world and the difficult task of warning humankind of the real danger it is facing has fallen upon Cuba.  We must not falter in that activity.  Faced with sceptics, our unmistakable duty is to continue fighting the battle.  It is a fact that a growing number of persons in the world have become aware of the reality. 

Commenting on the first part of the interview published on Monday, August 30 by the director of La Jornada in that prestigious Mexican newspaper, a citizen of Our America who read it on the CubaDebate website voiced his opinion with words that were so profound that I decided to include the crux of his thoughts in this message to the university students of Cuba:  

“I call out to all the countries that today are involved in military conflicts.  Please, always think about achieving true peace, that is what we need most.  Our children, our grandchildren and the human beings of this world, all of us will thank you.  We need to live in peace and security on a planet that day by day becomes less liveable.  It is very easy to understand.  Nuclear weapons should disappear, no country should have them, atomic energy should only be used for good.  THE ONLY REAL VICTORY IS IN ACHIEVING PEACE.

“Today we face two great challenges: the consolidation of world peace and saving the planet from climatic changes.  The first is to achieve a lasting peace on solid bases, the second is to reverse climate change.  We have to become aware of these problems that we ourselves have created and that we are the protagonists of the changes we must attain.  The panorama of the last century was not the same as the one in this century.  Weaponry, at this time, is much more sophisticated and deadly and the planet is weaker and more polluted. 

“World Conference on Climate Change in Cancun […] the only opportunity left to us.  […] We are getting to a critical point where there is no turning back.  At that moment, because we are afraid, we would like to do anything to save our lives, but by now everything is in vain and it is too late.  The opportunities in our lives appear before us just once and we must know how to make use of them.  Our Mother Nature is like a passive smoker who still has not become addicted, we are making her sick indiscriminately.”

“Nobody has the right to use violence against any human being, country or nation.  Nobody can cut down a tree if he hasn’t first planted three. […] We cannot turn our backs on nature.  Quite the opposite, we must always embrace her tightly.  Because we ourselves are nature, we are part of that fan of many colours, sounds, balance and harmony.  Nature is perfect.

“Kyoto signified hope for all human beings …”

“If we do nothing.  Nobody will be saved, there will be no safe place on earth, not in the air, not in the cosmos.  The great energy that accumulates daily because of the greenhouse effect, since the solar rays are trapped and emit more energy every day onto the surface of the earth.  It will cause natural disasters having unpredictable consequences.  Would there be anyone on earth with a button that would be able to stop such a disaster?”

“…we cannot lose any time on anachronistic wars that weaken us and use up our energies.  Enemies make wars.  Let us eliminate all the causes that make men see other men as their enemies.  Not even those who face each other in a war are aware that this is the solution to their problems, they react to their emotions and ignore their consciences mistakenly thinking that the road to peace is war.  I say, without the least margin for error, that peace is attained with peace and: IF YOU WANT PEACE, GET READY TO CHANGE YOUR CONSCIOUSNESS (Applause).”

Here you have the essence of his words, quite simple and within the reach of any citizen on earth. 

On Wednesday, September 1st, as I was writing this message, information appearing on the CubaDebate website brought us the following news: “A new wave of leakage about an attack on Iran’s nuclear targets being prepared by Israel together with the United States might this time have a basis in reality, as expressed in an article printed this Tuesday by George Friedman, the executive director of the prestigious Stratfor Centre, which has some former CIA analysts among its collaborators..” He is a well educated person with prestige. 

The information goes on to say:

“There have been numerous occasions on which different versions of the possible attack on the Islamic Republic presumably filtered from secret services have been spread.  According to experts, it dealt with an attempt to exert psychological pressure on Teheran to make it seek consensus with the West.”

“…this technique didn’t work and it is highly unlikely that it will be used again with the same objective, states Friedman…”

“‘It is a paradox, but the new slew of rumours about war may this time be directed towards trying to convince Iran precisely that there will be no war, while in reality, war is now being prepared’ …”

“The analyst completely discards the fact that Tel Aviv is daring to embark on a military operation without counting on the support of the Pentagon.”

“At the same time, the expert warns that the most serious consequence of the possible attack against Iran would be that the Islamic Republic would block the Strait of Ormuz, between the Oman and Persian Gulfs, and that would collapse 45% of world oil supplies thus shooting prices sky high and making world economic recovery after the recession difficult.”

Thus concludes the information. 

I find it incredible that the fear of an attack is due to consequences that the price of oil may suffer and to the struggle against the recession.  I myself do not harbour the least doubt that the capacity for Iran’s conventional answer would provoke a ferocious war, control of which would escape the hands of the warring parties and it would become an irremediable global nuclear conflict.  That is what  I maintain. 

An important AFP dispatch states that former British Prime Minister Tony Blair warned this Wednesday in a BBC interview when talking about his memoirs being released, that the international community might have no other alternative than the military option if Iran were to develop nuclear weapons.” 

It continues:

“Blair concluded that he thought that there was no alternative to this if they continue developing nuclear weapons.  They should receive this message loud and clear, he added, echoing a threat that has already been made several times by the US and Israel.

Of course, if they are manufacturing nuclear weapons they have no proof nor can they have any proof because they are using some research centres, doing research; they don’t have, for up to two or three years as they themselves have admitted, any material to begin manufacturing a bomb.  This without taking into account that manufacturers of nuclear weapons have 25,000 nuclear weapons, without counting the unimaginable conventional ones.  They have no proof of this, it’s a research centre.  Is that a reason to attack them?  Having a plant producing electrical energy, coming from uranium, that’s nothing constituting a crime and for them it is proof they are manufacturing weapons.  They have already done it, they did it in 1981 against an Iraqi research centre, and they did it in 2007 against a Syrian research centre; they didn’t talk about that, it’s somewhat of a mystery why they didn’t speak of it.  Because there are terrible things happening that nobody talks about and nobody prints them. 

Well, that is the proof, because they are talking about attacking those reactors and those research centres.  That’s why one cannot become confused by the little words “if they try” to manufacture nuclear weapons. 

A new dispatch from the ITAR-TASS agency reports that sanctions against Iran will not report any desired results, the Iranian problem must not be resolved by any method using force.  Today, Sergei Lavrov, head of Russian diplomatic services, stated this in his speech before students ?what a coincidence - of the MGIMO International Affairs Institute.” 

And the cable goes on:

“We come from the idea that no world problem should be resolved using force, he stated.  Lavrov drew attention to the position of US President Barack Obama in regard to Iran, especially involving Iran in the negotiated process.  We welcome a normalization in US-Iran relations, he added.  

I would think that Russia is not just a member of the Security Council with the right to veto, but also a powerful country whose opinion cannot be ignored.  Independently of the fact that in that Resolution of June 9th, all those with the right to veto supported the Resolution.  Turkey and Brazil did not support it, and Lebanon abstained.  That was a very important moment because the Resolution was approved; it authorized inspection of Iranian merchant vessels and also established a term, they said it was 90 days, and some say it expires on the 9th, other say on the 7th.  It also says that on that day they have to inform if they attacked or not. 

Now we must sit back and wait to see what they will do in this situation, how they value world opinion, what effect it will have, if they will invent another term or not, if they declare they are not going to do it, or if they ratify that they are going to do it, it might take a bit longer, but it cannot be a lot of time. 

I recommend that we are watchful, that we ask our information media to communicate to us, so that we can closely follow the situation. 

Thanks to the electronic media there are persons in the world, a growing number of persons who are being informed, because they cannot prevent that, besides even if the news agencies and the great information media in the hands of the powerful capitalist corporations keep silent, the world is finding out about it.   I tell you this because of the number of messages that are arriving.  I read you one opinion that I selected: it is at 4:52, at 4:54, another at 4:55, the comrades who collect these explain that they are coming from all parts of the world, not just from Latin America.  It is impossible to collect and comment on them all, we have an idea about the state of opinions, about their credibility or not, and I can tell you that they are being given great credibility just as you are doing.  It is clear, and that is decisive.  It is a new stage, never have we seen a situation like this. 

Therefore, I suggest to you, and to all our compatriots that are trying to be aware, and to our press media that inform us, because at times the international press keeps strangely silent and then suddenly a series of news items appears.  The ones that are going to come out next, each day they will be more interesting. 

Nobody can say exactly what is going to happen, because these events are unravelling. 

What is going to happen on the 7th, the 9th, the 15th, the 20th?  We have to make our plans, work plans, everyone makes their own.  As for me, I will be concentrating; I am concentrating on this for a while now, collecting as much information as possible. 

But in all this, we all play a part in the job, a part of the responsibility that doesn’t mean that we have to stop whatever we are doing. 

Also, another very important country, it is the last one mentioned here, because it was the last cable, yesterday afternoon. 

A Reuters dispatch states that the European Union is pressuring China to comply with sanctions against Iran. 

Because besides the famous June 9th agreement, number  1929, establishing the sanctions I mentioned, these European satellite powers and those from other parts, imposed additional sanctions to strangle the country and, in this case, they were complaining about China, also about Russia in terms of what they were going to do, but it stated thus:

“The official responsible for the European Union foreign policy, Catherine Ashton, said on Thursday that China had been pressured to ensure that Chinese companies would not fill the void left by other companies that had abandoned Iran because of the sanctions …” It doesn’t say what sanctions, whether the ones by the 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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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5 12:43 2010/10/05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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